외줄 타는 사람

by 엔데

- 내가 광대였던가?


사과씨는 자신에게 물었다. 사과씨는 눈을 흘겨 살짝 내려다보았다. 색이 바랜 슈트 밖으로 소매에 누렇게 때가 탄 셔츠가 보였다. 옷차림으로 봐서는 광대가 아닌 것 같다.

- 하지만 광대라고 양복을 입으면 안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양복을 입는 광대가 있을 수 도 있지 않을까. 반짝반짝거리고 알록달록한 고깔 옷만 입어야 광대인 것은 아니다. 만약 내가 어떤 현실 비판극의 광대라면? 양복을 입고 불행한 일을 당하는, 요컨대 찰리 채플린 같은 광대는? 이런 생각이 들자 사과씨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려고 했다. 혹시 자신이 빨간색 코 같은 것을 끼고 있지 않나 해서.

하지만 손을 뻗을 수가 없다!

사과씨는 당황하여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양 손에는 길게 뻗은 막대기가 가로 들려있었다. 사과씨는 그 막대기를 가슴팍에 가깝게 붙잡고 있는 상태였다. 얼추 사과씨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낭창낭창한 막대기다. 재질은 대나무처럼 잘 휘는 나무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어떤 음흉스러운 재질의 플라스틱일 수 도 있다.

그제야 사과씨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깨달았다.

사과씨는 줄을 타고 있었다.

- 제기랄!

내가 줄을 타고 있다!

입으로 뱉으면 줄이 떨릴까 무서워 사과씨는 욕지기마저 마음으로 삼켰다. 사과씨의 다리는 오한이 든 사람처럼 떨렸다. 힘이 풀린 다리가 꺾인 꽃줄기처럼 접혔다. 사과씨는 손을 뻗어 줄을 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막대를 놓고 줄을 잡는다면 이대로 추락하여 빨랫감처럼 널릴 것이 분명했다. 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자신을 사과씨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곧 떨어져서 바닥에 피투성이로 널브러진 자신까지. 추락하면 바닥에 껌딱지처럼 붙었다가, 엄지에 바람을 불면 살아나는 아동용 만화의 주인공 같은 일은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란 것도.

줄은 이제 반대편에서 누군가 악의적으로 흔드는 것 같이 크게 흔들렸다. 줄 위의 사과씨는 멀리서 보기에 마치 흥겨운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누구도 가까이에서 사과씨의 창백한 얼굴을 봤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사과씨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까딱하면 추락할 것이다.

사과씨는 필사적으로 아래를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줄 위에서 밑을 보면 그대로 힘이 풀려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언제 읽었는지 모를 황색지의 가십난을 용케 기억하고 있는 탓이었다.

- 밑을 보면 안 돼 밑을 보면 안 돼 밑을 보면 안 돼 밑을 보면 안 돼 밑을 보면 안 돼 밑을 보면 안 돼.......

사과씨는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되뇌었다. 줄타기의 신이 그 기도를 들은 것인지, 되뇌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위험하다는 것을 까먹은 것인지 몰라도 점점 줄의 진폭이 줄어들었다. 사과씨의 다리에도 힘이 돌아왔다. 다리는 다시 처음처럼 곧게 펴졌다. 안도의 땀이 셔츠 아래로 흘렀다. 사과씨는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작은 바람도 없이 정적이 그를 에워쌌다.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는 사과씨의 가슴께에 들어있는 심장과, 점점 진정되고 있는 숨소리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희미해져 이제 잘 들리지 않았다. 정적은 추락의 공포만큼 무서웠다.

- 거기 누구 없어요!

사과씨는 어렵사리 얻은 균형을 깨지 않는 선에서 가장 크게 외쳤다. 하지만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쩌면 사과씨를 감싸고 있는 이 공기가 그 질문을 게걸스럽게 먹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 누가 저 좀 도와주세요!

소리를 지르느라 막대기 끝이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렸다. 그렇게 뽑아낸 소리는 아까보다는 제법 컸는지 희미한 메아리가 전방에서 반향 되었다. 하지만 그 메아리는 사과씨의 목구멍에서 나왔던 소리가 아니라, 지나가던 바람이 실수로 내뱉은 말 같았다. 메아리는 쉭쉭 거리는 쇳소리를 냈다.

메아리는 사과씨를 더욱 외롭게 했다. 메아리는 여기엔 사과씨 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과씨의 위 쪽으로 파랗다 못해 눈이 부신 하늘이, 아래쪽으로는 넓게 펼쳐진 사막밖에 없다. 어디 있는지 모를 해는 지치지도 않고 사과씨를 내리쬐고 있었다. 줄은 끝없이 뻗어나가다 하늘과 사막이 만나는 지평선에서 끝났다.

내 뒤에는 무언가 있지 않을까? 사과씨는 생각했다. 그래, 몰래카메라처럼.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카메라가 나를 찍고 있고, 사람들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모니터로 보고 있다. 아까 균형 잡느라 진땀 뺐던 걸 보면서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겠지. 내가 바닥에서 한 뼘도 안 되는 줄에서 떨어지면 어디선가 사람들이 나타나서 깔깔거릴 것이고,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안도하면 된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누구도 사과씨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니, 사람들은 사과씨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하지 않고, 혹은 존재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 이대로 떨어지면 사과씨는 사람 손에 납작하게 터져 죽은 파리처럼 지상에 꽂힐 것이다. 그때 뒤늦게 누군가 급하게 사과씨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어도 이미 사과씨는 큰 단백질 덩어리라 어떤 말도 못 해줄 것이다.

줄 위에서 별달리 할 것이 없었기에, 사과씨는 조심스럽게 발을 뻗어 보았다. 의자에서 오래 앉아있다가 일어날 때처럼 온몸의 근육들이 작은 비명을 질렀다. 뒤쪽에 있던 왼발이 허공을 잠시 헤매다가 오른발의 바로 앞쪽에 놓였다. 거리로만 치면 사과씨는 한 뼘 정도를 이동한 셈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소 흔들리기는 했지만 아까처럼 오금이 저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사과씨는 줄 위를 걸었다. 흔들리는 얇은 줄 위에서 할 거라고는 걷는 것 밖에 없었다. 그냥 걷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별 의미는 없다. 앞으로 가고 싶어서라기 보다도 멈춰있는 것이 싫어서. 그리고 외줄 위에서 걷는 것은 가을 낙엽이 떨어지는 것, 낡은 옷의 헤진 소매, 먼지가 바람에 쓸려나가는 것, 시궁창의 작은 생쥐처럼 하찮다.

걷는 것에 집중하자 외로움이 좀 가시는 기분이었다. 사과씨는 발끝에 모든 신경을 두고 한걸음 한걸음 발을 놀렸다. 겨우 한 뼘 정도였던 걸음걸이는 이내 평범한 걸음걸이 수준까지 되었다. 사과씨가 들고 있는 긴 막대기는 균형 잡는데 생각보다 더 유용했다. 사과씨는 자신이 줄타기에 꽤 재능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심지어 조금 유쾌해 지기까지 했다. 이 아무도 없이 끝없이 뻗은 줄 위에서.

그렇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정도밖에 없었다.

정말로 외줄 위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사과씨는 이내 걷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고, 다시 외로움이 겨울처럼 사과씨를 덮쳤다. 사과씨의 마음속에 잠깐 떠 올랐던 유쾌함은 다시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이제 끝없는 정적과 바뀌지 않는 풍경이 다시금 사과씨를 압도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사과씨는 우울 속에서 궁금했다. 도대체 이 끝없이 뻗은 줄은 언제쯤 끝나게 될까. 도대체 나는 언제쯤 이 줄 위에서 내려갈 수 있을까. 하지만 도무지 바뀌는 것은 없다. 가슴속에서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사과씨는 그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수도, 그런 질문을 받아줄 사람조차 찾지 못했다.

- 떨어져 버릴까?

하지만 그런 선택지는 애초에 사과씨에게 없었다. 자신의 생명을 걸 정도로 사과씨는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과씨는 겁쟁이였다. 사과씨는 단지 누군가 그런 결심을 했다는 것을 누군가 들어주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외침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과씨는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따라서 사과씨는 그저 걷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몇 걸음이나 왔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작은 단서조차 사과씨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해는 누가 하늘에 못 박아 놓은 것처럼 조금도 기울지 않았다. 사과씨는 앞으로 걷기만 했다.

외줄 타기란 그렇게 잔인하다. 떨어지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앗아가지만 외줄을 탄다고 해서 별다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사과씨로서는 매우 불합리한 게임을 참가한 셈이다. 심지어 그 불합리하고 멍청한 게임의 참가 의사조차 사과씨는 선택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너무 자만했던 것일까? 이런 불합리한 게임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이었을까? 아니면 어서 이 게임을 끝내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짓일까? 사과씨가 발을 잘못 디뎠다. 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곳에는 허공이 있었다. 공기 분자 몇 개가 사과씨의 발을 받쳐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사과씨의 몸이 기울었다.

사과씨의 온몸의 근육들은 어떻게든 균형을 맞춰보려고 발악을 했지만, 이미 사과씨의 무게중심은 줄 위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할수록 사과씨의 몸은 더 불안정해졌다. 줄은 화난 말처럼 자신의 위에 올라탄 사람을 거세게 떨어트리려고 하였다.

결국 사과씨는 줄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사과씨는 줄에 매달렸다. 정확히는 나무 막대를 걸쳐서 매달렸다. 무슨 정신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사과씨는 그렇게 완전히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안도하기에는 일렀다. 사과씨의 손에서는 힘이 언젠가 빠질 것이고, 나무 막대를 잡고 있는 손이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다시 사과씨는 잘 퍼진 반죽의 모습으로 죽을 것이다.

사과씨는 살기 위해 버둥거렸다. 사과씨 역시 나무 막대에 매달린 자신의 운명을 잘 알고 있었다.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줄 위로 올라가야 했다. 사과씨는 강한 바람에 날리는 빨랫감처럼 버둥거렸다. 그리고 사과씨는 어떻게든 줄 위로 다시 올라갈 수 있었다.

도대체 사과씨는 어떻게 다시 줄 위로 올라간 것일까? 외줄에 매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 광경은 거미줄에 걸린 파리가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는 것과 비견할 수 있었다. 생을 건 몸부림은 추하고, 이해할 수 없다. 줄 위로 다시 올라왔을 때, 사과씨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사과씨는 줄 위에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사과씨는 죽음에서 돌아왔다.

다시 풍경은 사과씨가 발을 헛디디기 전과 모든 같은 것처럼 보였다. 굳이 다른 점을 찾자면, 사과씨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것과, 젖은 옷이 사과씨의 몸에 들러붙어 사과씨가 더 왜소하게 보인다는 것 정도였다. 누군가 발을 헛디디기 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비교하면,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명백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다. 어떤 예감이, 저 멀리 천둥과 번개가 다가오는 냄새가,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절규 같은 환희가, 눈 앞을 가득 메우는 따뜻한 고통 같은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이 끝없이 늘어진 외줄 위의 인간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더 일어날 수 있을까?

사과씨는 분노하고 있었다. 분노가 목 끝까지 치밀어 올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였다. 막대기를 잡고 있는 사과씨의 두 손이 하얗게 물들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호흡이 가팔랐다. 목이 따끔따끔하고 눈알에 핏줄이 섰다. 꽉 다문 입 사이로 소리가 비집고 나왔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사과씨의 분노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과씨는 그저 모든 것에 화를 내고, 저주를 퍼부었다. 자신이 서 있는 이 멍청한 외줄이나, 몸에 들러붙는 더러운 양복, 쓸데 없이 낭창거리는 막대기, 숨만 막히게 하는 공기와 저 게으른 태양, 어디선가 사과씨를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화를 내었다. 사과씨는 자신을 이 거지 같은 외줄에 올려놓는데 일조한 모든 사람들이 평생 고통 속에 죽어가기를 빌었다. 그리고 이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도 모두 똑같이 죽어버리기를! 모두 망해버리기를!

줄에서 떨어졌다 다시 올라온 사과씨는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곳엔 줄에서 떨어졌다 올라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지옥이 있으리라. 그곳을 한 번 다녀온 사람은 영영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사과씨는 더 이상 분노할 대상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쏟아부을 분노는 사과씨에게 아주 많이 남아있었다. 오갈 데 없었던 분노는 결국 사과씨를 향했다. 사과씨는 자신에게 화를 내었다. 자신을 향해 소리치고, 저주를 퍼부었다. 위협적으로 몸을 흔들었다. 들고 있던 막대기로 머리를 치댔다. 왼발을 들어 오른발을 밟았다. 혀를 깨물고, 발을 굴렀다. 더 이상 떨어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사과씨는 화를 내야만 했다.

그래서 사과씨는 뛰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사과씨가 말이다. 뛰는 것은 사과씨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파괴적인 선택이었다. 사과씨는 되는대로 바닥을 굴렀다. 줄은 사과씨의 무게에 푹 꺼졌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사과씨가 지르는 비명이 무서워서 그랬을까? 알 수 없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사과씨는 멈추지 않았다. 다리는 제멋대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팔은 다리와 전혀 다른 리듬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사과씨 머릿속은 하얗게 타올랐다. 눈 앞에 여러 색깔의 폭죽이 터졌다. 이제 땀 조차 나오지 않았다.

사과씨는 하나의 커다란 불덩이가 되었다. 사과씨는 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날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과씨의 발아래 줄은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멀리서 본다면 유성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그 무엇도 영원히 뛸 수는 없다. 사과씨는 점점 느려졌다. 뜀박질에서 빠른 걸음으로, 빠른 걸음에서 느린 걸음으로, 느린 걸음에서 즈문즈문한 발걸음으로. 끝내 사과씨는 멈추었다. 하지만 정신은 그 보다 더 오래 뛰었는지, 아직 사과씨는 자신의 몸이 멈췄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사과씨는 영혼이 빈 껍데기 같은 상태였다. 사과씨의 정신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아직도 달리고 있는 정신을 내버려둔 채 적막이 사과씨를 휘감았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사과씨의 정신이 돌아왔다. 발 끝부터 천천히 사과씨의 몸이 의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머리까지 모든 의식이 돌아왔을 때, 사과씨가 말했다.


-내가 광대였던가?







사진: 길버트 가르셍(Gilbert Garcin), 줄타기(Le funambule),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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