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한 남자가 밤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마을의 누구도 그를 알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처량한 사연이 있는 외부인이라고만 생각했고, 경찰은 무심하게 그를 나무에서 끌어내렸다. 시체는 화장터에서 불태워졌다. 경찰은 뼛가루가 담긴 싸구려 옹기를 발로 차며 웅얼거렸다.
“재수가 없으려니, 별의별 일이 다 생기는군.”
그렇게 한 남자의 이야기는 끝났다.
그리고 그해 가을, 남자가 목을 매달았던 그 밤나무에는 열매가 열렸다. 그것은 멀리서 보면 가시가 숭숭 난 평범한 밤나무 열매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 열매의 둘레는 장정이 한 아름에 안을 수 없을 정도로 컸고, 가시는 굵다 못해 꼬챙이에 가까웠다.
열매는 마을 사람들의 탐욕스러운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다. 나무 아래서는 도통 보이지 않는, 밤나무 잎이 무성한 높은 곳에 열매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열매는 빠르게 무르익어 가을의 낙엽이 무성한 땅으로 떨어졌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낙엽이 열매를 덮었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밤 열매에서 밤나무 인간이 태어났다.
새로운 종류의 생물이 태어났다고 생각해보자. 충분한 시간이 있어서 다양한 연구를 할 수 있다면, 그에게 밤나무 인간보다 좀 더 좋은 이름이 주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참수리 부엉이나 넓적 갈치 새 같은 멋진 이름 말이다. 하지만 밤나무 인간에게는 그러한 멋진 이름이 붙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밤나무 인간이 되었다.
그렇지만 밤나무 인간이라는 이름은 그에게 꽤나 잘 맞았다. 그의 피부는 많은 부분에서 나무의 껍질 같았다. 회 잿빛의 거죽, 굵고 깊은 주름, 군데군데 난 옹이와 곧 떨어질 것 같은 조각들. 그의 얼굴은 윤이 나는 밤색의 껍질로 뒤덮여 있었고, 머리카락이 있어야 할 곳에는 날카롭고 뾰족한 가시들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길고 호리호리하지만 단단한 몸매와 앙상해 보이는 팔다리는 영락없이 겨울철의 나무를 연상시켰다. 만약 어떤 사람이 숲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밤나무 인간의 모습을 봤다면, 그저 어떤 나무이겠거니 하며 지나갔으리라. 하지만 밤나무 인간은 분명히 살아있었다. 아니, 살아있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밤나무 인간은 보통 사람들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배도 고팠으며, 생각할 수도 있었고,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처음 발견한 것은 마을의 가난한 신부였다. 해가 하늘 꼭대기에 걸린 오후, 산길을 따라 휘적휘적 내려오는 밤나무 인간의 모습을 본 신부는 그를 처음엔 바람에 심하게 부대끼는 나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나무는 꾸준히 움직였으며, 마침내 그가 밤나무 인간인 것을 안 신부는 놀라서 성호를 그었다. 그의 생김새로 보면, 그는 신의 피조물이라기보다는 악마의 하수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부 앞에 선 밤나무 인간이 그를 따라 성호를 긋자, 신부는 그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신부는 밤나무 인간의 아기 같은 순수한 눈망울에서 -사실 그는 막 태어났다- 자신 앞의 이 존재가 사악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신부는 이 만남에 분명히 신의 뜻이 있으리라 생각했고, 그를 마을에서는 꽤 떨어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이 보기 드문 진실한 신부는 지나칠 정도로 청렴한 편이라 누군가를 호강시키며 보살필 정도는 못되었지만, 밤나무 인간을 키우는 것은 아주 쉬운 편에 속했다. 밤나무 인간은 많은 양의 물을 마셨고, 가끔 흙 한 줌을 먹는 것으로 식사를 다 했다. 추위도 거의 느끼지 않았다. 서서도 잘 수 있어서, 잘 때는 그냥 마당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누워서 잘 때, 그는 허리 결림을 느꼈다). 신부는 밤나무 인간에게 말과 글을 가르쳤다. 다행히 밤나무 인간은 천재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영특했고, 금세 말을 할 수 있었다.
밤나무 인간은 신부의 사랑을 받으며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신부는 밤나무 인간과의 만남을 신이 주신 기적이라 생각하며, 마침내 밤나무 인간을 마을로 데려갔다. 분명히 신부는 신의 사랑과 믿음의 기적, 위대한 회개를 밤나무 인간을 통해 설파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의 생각만큼 너그럽지 않았다. 밤나무 인간을 처음 본 마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리고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은 횃불을 들고 신부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의 요구는 한 가지였다.
“끔찍한 밤나무 인간을 마을에서 쫓아내십시오. 그는 악마의 하수인일 겁니다.”
눈에 광기가 이글거리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신부는 다시 한 번 신의 사랑을 말했다. 때때로 추악한 겉모습 뒤에 가장 선량한 영혼이 있다고, 빛나는 영혼에게 겉모습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이다. 하지만 두려움에 반쯤 미쳐버린 군중들은 신부와 밤나무 인간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성난 돌을 피해 집으로 쫓겨 들어간 그들에게 횃불을 던졌다. 불은 빠르게 번져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의 집은 너울거리는 화염에 잠겼다.
정말로 신이 이 선량한 신부와 밤나무 인간을 보살펴주었다면, 작은 비라도 내려주었을 것이다. 기적은 마을 사람들의 광기를 잠재우고 회개시켰으리라.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신부는 불에 타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불에 타는 신부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안심하고 집에 돌아가 잠을 청했다. 여담이지만, 그해 가을, 정체불명의 큰 산불이 나서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죽었다. 반쯤은 불에 타서, 반쯤은 연기에 질식해서 말이다.
하지만 밤나무 인간은 죽지 않고 탈출할 수 있었다. 그건 그가 연약한 살로 이루어진 여느 인간이 아니라 밤나무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피부 껍질이 반쯤 탔고, 머리에는 뻘건 불똥이 이글거리는 상태로, 온몸에서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밤나무 인간은 정신없이 마을을 등지고 달아났다. 그는 정신없이 달아나면서도,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엉킨 머릿속을 풀어보려 애썼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고함소리, 신부, 비명, 복수, 용서, 죽음, 나무, 사람, 신 같은 모든 가치들이 머릿속에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달리는 밤나무 인간 위로 해가 몇 번인가 뜨고 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밤나무 인간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밤나무 인간이 눈이 뜬 곳은 어느 유랑 서커스단의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였다. 정신을 잃은 그를 누군가 발견하고 서커스단에 팔아넘긴 것이었다. 밤나무 인간이 눈을 떴을 때, 그의 목과 손, 발에는 크고 검은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밤나무 인간은 서커스 단원이 되었다. 말이 좋아서 단원이지,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었다.
서커스 단장은 콧수염을 길게 기르고, 얇게 찢어진 눈 때문에 비열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은 키를 감추기 위해 항상 단이 긴 검은 챙모자를 쓰고 다녔다. 또 한 손에는 강철로 된 지팡이를, 한 손에는 채찍을 들고 다녔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거역한다 싶은 사람들을 지팡이와 채찍으로 후두려치곤 했다. 밤나무 인간이 눈을 뜨고 가장 처음 본 사람이 단장이었고, 단장은 밤나무 인간의 목에 쇠지팡이를 들이밀며 말했다.
“꿈에 나올까 무서운 괴물이군. 잘 팔리겠어.”
서커스단에는 밤나무 인간 못지않은 기괴한 사람들이 많았다. 정상적인 사람이라고는 단장과 표를 판매하는 몇몇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 외에는 모두 꼽추, 난쟁이, 거인, 개구리를 닮은 사람, 외눈박이, 세팔이, 쭈그렁 노파, 등에 얼굴이 하나 더 있는 샴 쌍둥이, 늑대인간 같이 괴이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밤나무 인간의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장미 소녀’라고 불리는 여자였다.
아까도 말했듯, 이 소녀 역시 시간이 충분했다면 다른 멋진 이름이 붙었을 테지만, 그녀는 그저 장미 소녀라고 불렸다. 초록색 피부에 빨간 꽃잎 같은 머리. 그리고 몸의 군데군데 나 있는 가시. 누가 봐도 그녀는 장미 같았다(하지만 그렇게 예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장미 같은 소녀가 아니라 장미 소녀이니까).
밤나무 인간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그녀를 보고 깊은 동질감을 느끼며 사랑에 빠졌다. 장미 소녀 역시 밤나무 인간을 보고 같은 감정을 느꼈다. 둘은 꽤 좋은 인연이었는데, 밤나무 인간은 장미 소녀의 피부에 나있는 가시에 찔려도 아프지 않았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굵고 단단한 피부에 고마움을 느꼈다. 소녀 역시 누군가를 그렇게 세게 안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단장과 몇몇 관리인의 눈을 피해 밤나무 인간과 장미소녀는 몇 시간이고 서로 껴안고 있기도 했다.
밤나무 인간은 서커스에 알맞았다. 그는 물속에서도 오랫동안 숨을 참을 수 있었고, 칼 같은 것에도 별로 아픔을 느끼지 못했으며, 힘이 아주 세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로 이상하게 생긴 괴물 역할을 맡아서 용사(단장)의 칼에 찔려 죽는 악역으로 나오거나, 여러 가지 물건들을 부수는 차력 쇼에 나왔다. 밤나무 인간은 그런 종류의 저급한 공연에서 조차 어느 정도 행복을 느꼈다. 그것은 그가 삶에 까다로운 취향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기도 하고, 사람들을 자기가 웃게 만든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뭐가 되었건, 밤나무 인간은 어느 정도의 소속감을 느끼면서 적응해나갔다. 적어도 그의 직장 동료들은 그를 괴물 취급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를 가장 행복하게 한 건, 단장이 내건 약속 때문이었다. 단장은 수시로 단원들을 모아 기합을 주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더 열심히 하란 말이다, 이 괴물들아. 이건 절대 강제로 하는 게 아니야! 그래, 내가 약속하지. 누구든지 100번 앵콜을 받는 녀석에게는 자유를 주겠다 이거야! 그때까지의 월급까지 같이 쳐주고 말이야.”
단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허공에 채찍을 휘두르곤 했다. 채찍이 별로 무섭지 않았던 밤나무 인간은 그것이 꽤나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나가게 된다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산속으로 가서 평생을 숨어 살 것이라고, 행복하게 조용히 살다가 죽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미 소녀도 같이. 그리고 그곳에서 여태까지 겪었던 불행을 서서히 치유해 나가리라고 마음먹었다. 그가 이런 생각을 장미 소녀에게 고백했을 때, 장미 소녀 역시 뛸 듯이 기뻐했다. 그녀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누가 먼저 나가든,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기다리자고 약속했다.
장미 소녀의 특기는 가벼운 몸을 이용한 체조였다. 그녀는 허공에 매달려 있는 나무 봉을 뛰어다니며 온갖 묘기를 펼쳤다. 그녀가 서커스장의 공중을 헤엄치듯 유영할 때, 사람들은 날아다니는 불꽃을 보는가 싶어 눈을 비볐다. 때때로 그녀는 까마득하게 높이 매달려 있다가 봉을 놓아 떨어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관객들은 그 끔찍한 사고에 탄식하면서 흥분했다. 그리고 터질 것 같은 정적 속에서 우아하게 일어나 다시 묘기를 하는 장미 소녀를 보면서 관객들은 열광했다.
장미 소녀가 99번째 앵콜을 받던 날, 장미 소녀는 밤나무 인간에게 그들이 알고 있었던 가장 높고 험한 산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언젠가 서커스단이 스쳐지나간 장소였다. 그 산은 찌는 듯한 여름에도 미처 녹지 않은 눈이 반짝여 멀리서도 눈이 부실 정도였다. 산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한 여름에도 긴 옷을 꺼내 입게 만들었다. 장미 소녀는 그곳에서 밤나무 사람을 기다린다. 초록색 피부가 하얀 눈 때문에 더 파래지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마침내 밤나무 사람이 도착하면 둘은 떠오르는 아침 햇살과 바람을 받으며 산을 내려가고, 외진 곳으로 몸을 숨겨 평생을 살아간다. 둘이라면 평생 행복할 것이다. 서로서로 상처를 보듬어 주면서.
그리고 장미 소녀의 100번째 앵콜이 되었다. 장미소녀는 단원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았다. 거인은 소녀에게 목마를 태워 줬고, 난쟁이는 꽃잎을 뿌려주었다. 인어는 수조의 물을 뿌렸으며, 외눈박이는 입에서 불을 뿜었다. 그리고 밤나무 사람은-물론 아무도 보지 않을 때-밤을 선물했다(밤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사연은 다음과 같다. 언젠가 그가 악당으로 연기를 할 때, 왕자 역할을 맡은 단장이 실수로 너무 깊게 밤나무 인간의 머리를 칼로 벤 것이다. 물론 피는 나지 않았다. 그는 갈라진 상처에서 까끌까끌한 알갱이를 꺼냈는데, 세상에, 밤 알갱이였다). 단장은 상자 가득 든 돈을 장미 소녀에게 건넸다. 그리고 말했다.
“자, 여기 보상이 있어. 다들 봤지? 이 녀석처럼 열심히 하라고. 다들 보상이 있을 거야.”
누군가 단장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그 미소가 음흉하고 사악한 미소라는 것을 퍽 알아차렸을 것이다. 썩은 생선은 상자 밖으로 악취를 흘리듯, 어떤 종류의 계획은 흉물스러움이 사람 밖으로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의 웃는 모습을 본 단원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밤나무 인간을 포함해서 말이다.
장미 소녀가 떠난 날 밤, 밤나무 인간은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불안이 안개처럼 그의 마음에 깔렸다. 단순히 곁에 있던 장미 소녀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아주 불행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예전 마을에서 신부가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시켜 주기 전에 느꼈던 바로 그 기분이었다.
결국, 밤나무 인간은 밖으로 나가 숲속을 돌아다니기로 했다(그는 종종 심란할 때면 그렇게 하곤 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캠프 밖으로 나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의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숲속의 나무들을 쓰다듬고 상쾌한 바람과 싱그러운 풀 냄새를 맡으면서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떨리는 손끝을 진정시켰다.
그때 비명소리가 들렸다. 불행과 고통을 머금은 비명이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비명은 공기 중에 더 잘 퍼지는 법인데,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밤나무 인간의 주의를 충분히 끌기엔 충분했다. 밤나무 사람은 가쁘게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비명 소리는 불규칙한 주기로 계속 들렸다. 그것은 말소리 같다가도,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외침 같기도 했다. 바람에 악의라도 있어 비명조차 왜곡하는 듯 했다.
빽빽한 숲 사이로 횃불이 보이자 밤나무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무성한 수풀 뒤로 숨어버렸다. 그리고 수풀 사이로, 그는 마침내 보았다. 장미 소녀와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검붉은 횃불에 둘러싸여 있는 장면을. 장미 소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녀를 두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비열하고 사악한, 밝은 낮에는 절대 하지 못 할 이야기 말이다. 끔찍한 예감이 밤나무 인간의 몸을 옥죄었다. 밤나무 인간은 꼼짝할 수 없었다.
무언가가 횃불에 비쳐 번쩍였다. 그의 눈앞에서 장미소녀는 머리가 잘렸다. 건장한 체격의 대머리 남자-그는 서커스의 경리였다-가 든 큰 칼에 의해서였다. 장미 소녀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자 붉은 꽃잎 같은 머리카락이 눈처럼 휘날렸다. 목에서 뿜어지는 피는 후두둑 소리를 내며 비처럼 땅을 적셨다. 옆에 있던 다른 남자는 떨어진 장미 소녀의 머리를 발로 찼다. 그렇게 날아간 머리는 밤나무 인간이 숨어있는 수풀로, 밤나무 인간의 앞에 굴러왔다.
밤나무 인간과 머리만 남은 장미 소녀의 눈이 마주쳤다. 아니, 밤나무 사람이 일방적으로 바라본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한 쪽은 무생물과 다름이 없으니. 둘의 시선이 영원과도 같은 지옥 속에서 이어졌다. 사람들은 소녀의 돈을 갖고 옥신각신 하고 있었지만 밤나무 인간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대신 밤나무 인간은 자신의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천둥처럼 큰 소리였다. 세상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자기가 사라지는 소리였다.
밤나무 인간은 고개를 돌려 사람 무리를 보았다. 그들은 머리가 없는 장미 소녀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고 있었다. 불은 활활 탔다. 순식간에 어두운 숲이 밝아졌다. 그리고 그 기이하게 밝은 불은 옛날의 어떤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밤나무 인간은 장미 소녀의 머리를 들고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시체의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끔찍한 괴물이었다.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그의 모습을 보자 꼼작 할 수도 없었고, 밤나무 인간은 그런 사람들의 머리를 터트려 죽였다. 그리고 밤나무 인간은 들고 있던 소녀의 머리를 먹었다. 향기롭고 진한 장미 꽃 냄새가 났다.
다음날 아침, 서커스단에는 작은 소동이 일었다. 경리와 조교를 맡고 있던 사람들 중 몇 명이 사라진 것이었다. 단원들은 하루 종일 단장의 혀를 차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에잉…….두 발 달린 것들은 믿을 수가 없다니까.”
밤나무 인간의 몸에서 불에 그슬린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들도 몇 있었지만, 다들 고개를 갸우뚱하며 넘겨버렸다. 밤나무 인간에게선 피 냄새도, 장미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저 희미한 불 냄새가 피부 깊숙한 곳에서 부터 스며 나왔다.
그 이후로 밤나무 인간의 얼굴은 평온해보였다. 개중 짓궂은 이가 밤나무 인간에게 장미 소녀가 보고 싶지 않냐고 물었을 때, 밤나무 인간은 얼굴에 작은 미소를 걸고 그렇다고 답했다. 다만 웃음 짓는 밤나무 인간의 얼굴이 기괴하게 뒤틀려 질문한 이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칠 뿐이었다.
밤나무 인간은 마침내 100번째 앵콜을 받았다. 그날의 서커스에서, 그의 공연은 모든 다른 공연을 압도했다. 특히 뜨거운 불 속을 걸어 다니는 그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퇴장했던 그가 다시 나와서, 관중들을 진정시켰다. 관중들은 열뜬 침묵 속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묘기를 보여줄 것인가. 그는 어떻게 우리를 즐겁게 해줄 것인가. 만약 관객 중에 선한 영혼을 가진 사람 있어서 밤나무 인간을 보았다면 그의 슬픔에 가득 찬 얼굴, 절망으로 일그러진 심장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괴물들이 하는 서커스 따위에서 즐거움을 얻는 사람들 중에서 선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밤나무 인간은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었다. 관중들은 열광했다. 무언가 벌어지는구나. 지금까지 못 봤던 쇼를 볼 수 있겠구나. 흥분으로 가득 찬 정적이 흐르고 밤나무 인간이 자신의 몸에 불을 놓았다. 불이 순식간에 밤나무 인간을 삼켰다. 환호성이 서커스 천막을 가득 메웠다.
그 환호성은 곧 침묵으로 바뀌었다. 밤나무 인간이 웃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주 크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가 서커스 장을 넓게 가로질러 가장 뒤에 있는 관객의 고막을 흔들었다. 그의 몸에 붙은 불이 그대로 웃음소리가 된 것 같았다. 그의 웃음소리는 모든 사람의 환호성을 먹어버렸다.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는데, 이제 웃음소리가 아니라 절규에 가깝게 들리기도 했다. 그는 계속 웃었다.
그는 웃는 채로 천천히 단장에게 걸어갔다. 단장은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그 다음은 공포로 움직이지 못했다. 밤나무 인간의 두 눈이 문자 그대로 불에 타오르며 단장을 꿰뚫었다. 그리고 불타는 손으로 단장을 집어 던졌다. 단장은 불이 붙은 채로 서커스 무대의 커튼에 부딪쳐 죽었다. 단장의 벌어진 살갗 사이로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그의 몸에 붙은 불을 끄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의 몸에 붙은 불은 무대 커튼에 옮겨 붙었다. 무대 커튼은 불에 잘 탔고, 이제 서커스장 전체가 불에 횝싸였다.
사람들은 이게 쇼가 아니란 것을 알아차리자 공포에 질렸고, 저마다 출구를 찾았다. 하지만 출구란 출구는 모두 닫혀 있었다. 매캐한 연기가 점점 낮게 깔려왔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 길을 찾아서 이리저리 뛰거나, 출구를 열어보려 애썼다. 소리를 지르고, 애원하고, 욕하고, 화내었다.
그리고 출구에 가득한 사람들 사이로 불타는 밤나무 인간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머리통이 손에 잡히는 대로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사람들이 지푸라기처럼 연기 속을 날아다녔다. 더러는 밤나무 인간이 휘두르는 팔에 맞아 머리나 목이 부러져 죽었다.
이제 서커스는 크게 타오르는 불 자체였다. 여전히 무너지고 있는 서커스장 사이에서 비명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정적이, 이따금 미처 무너지지 않고 남은 잔해가 불길하게 부서지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소리 내지 않는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어디선가 밤이 익는 고소한 냄새가 났다.
사건을 조사하던 마을 경찰관은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저기 불에 탄 시체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어이없는 화재 사고로 서커스를 보고 있던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물론 불에 탄 시체 뿐 만 아니라 머리가 없거나 뼈가 박살난 시체가 눈에 띄기는 했지만, 경찰관은 무심했다.
경찰관은 불에 탄 시체를 그러모아 화장터에 한꺼번에 집어넣은 다음, 남은 뼛가루를 허공에 날려 보냈다. 그 경찰은 혼자 중얼거렸다.
“재수가 없을 라니, 별의 별일이 다 생기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