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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Aug 27. 2015

어떻게 살 것 인가에 관한 이야기

실제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심란한 날이 있다. 

  그럴 땐 보통 세 가지가 삐걱 이는데, 첫째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 둘째는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좌절감, 셋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길 잃음이다. 이 세 가지가 죽이 안 맞기 시작하면, 마치 서로 간섭하는 파동마냥 서로가 서로에게 부정적인 강화 효과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날은 끝도 없이 심란해진다. 한숨이 나오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거나, 머리를 쥐어 뜯는다.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럴 때, 나는 한 길을 향해 달려가는, 뒤를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들을 보고 배알이 꼴려한다. 종종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나는 무엇을 할 거예요'라고 말하는 사람들. 자신의 삶이 어떤 꿈이나 목표에 맞춰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들이 부럽냐고?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정한다. 그들은 동정받아 마땅하다. 미래만 살고 있는 그들은 대체로 삶을 살 줄 모르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난 것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맞는 말일지라도, 그것이 너무나 맞는 말이기 때문에 어떤 개인에게, 나에게 적용시킬 수 없다. 나는 그렇게 무가치한 삶과 가치 맹목적인 삶 사이에서 길을 잃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사실 빛살 좋은 개살구 같은 질문일 것이다.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반드시 '무엇이'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정의하기 전에는 '어떻게'라는 것에 대답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살 것인가?


  '무엇을' 살 것인가? 비참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 말하는 어떠한 이해도 삶의 일정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 인간은 해석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해석은  개개인마다 모두 다르다. 그 해석을 해석하는 것도 모두 다르다. 모두 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고 있지만 모두 다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으며, 모두 다 그것이 옳다고 믿는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살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럽게 그 질문을 회피하려 한다. 요컨데 '아무 생각하지 말자.' 누군가 인생에 대해 고민해보라고 나에게 조언한다면, 나는 그 사람의 엉덩이를 걷어 차 줄 것이다. 고민하던, 고민하지 않던 인생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고, 당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그 삶 또한 아주 높은 확률로, 거의 확실하게 틀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고민해봐야 내 인생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그냥 삶이 제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내가 심란하다고 해서, 내 인생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으며, 내가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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