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게 개인적인 일을 풀어놓는 것 같아 이 글을 읽을 수도 있는 미명의 독자들에게는 다소 미안합니다마는, 도저히 풀어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이것은 다소 사상의 배설에 불과하고, 염치없는 희극 놀음에 불과할 수 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읽을만한 가치가 없고, 읽더라도 무슨 소리를 내뱉는 것인지 당최 알 수 없는 줄 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어제 이별을 겪었습니다. 정확히는 그저께라고 말을 해야 합니다만, 이별을 말한 뒤 다음날 한 번 더 만났으니 엄밀히 말해선 어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좀처럼 진정할 수가 없더군요. 어딜 가도 목에서 입이 가까운 구멍 언저리에 누가 솜털 뭉치라도 팍 박아 넣은 것처럼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간신히 진정하면 두근두근 심장이 떨리는 바람에 도무지 어느 일에도 집중할 수 없고……. 그 어떠한 것에라도 말입니다.
아주 주관적인 의견입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개인사를 떠벌떠벌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광대로 만드는 짓에 불과해요. 스스로 어떤 일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가장 내밀한 비밀은 불문에 부쳐야 하니까요. 당신이 만약 누군가의 치욕스러운 비밀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알고 있는 비밀이 꽤나 당신에게 치욕스럽다고 느껴지더라도, 당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밀의 당사자를 다소간 덜 치욕스럽게 만들 겁니다. 우리 현대적인 인간은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것을 당최 주저하지 않으니까요. 현대인들은 자신이 바보가 되었다는 사실을 남한테 알리는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에코의 주장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이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어서 빨리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나를 바보로 생각해주었으면 하는 기분입니다. 그런 종류의 관심이 필요합니다. 공감까지도 필요 없고, 사람들이 나를 보면서 깔깔 거리며 비웃는 그런 종류의 관심이라도 말입니다. 나 스스로가 아주 멍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해주었으면 합니다. 진실로 그러합니다.
처음 고백한 것이 지하철 개찰구였고, 마지막으로 헤어진 것도 지하철 개찰구 앞이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놀랍습니다. 지하철 개찰구와 개찰구 사이에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네요. 이 모든 일이 길게 갔다 온 휴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6개월 정도 다녀온 휴가 말입니다. 훌쩍하는 마음에 역에서 출발해서, 여행을 마치고 다시 역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똑같은 2호선 역사이고, 강남역에서 왕십리 역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그렇게 이별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조금 더 부여하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래요. 6개월이 조금 지났었습니다. 처음 사귄 뒤로 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짧은 기간일 텁니다. 하지만 저는 도통 사귀었던 모든 여자 친구들과 120일을 통 넘겨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저에겐 최장 기록의 연애 인 셈입니다. 도대체 저란 인간은 어떻게 되어먹은 것일까요? 주변엔 심심치 않게 3년을, 아니 5년을 한 사람과 만난 사람도 있는데 말입니다. 저는 연애를 하기 위한 '근본적인' 무언가가 부족한 걸까요? 저는 긴 연애를, 안정적인 연애를 하기에 근본적으로 부족한 사람인 건가요?
이런 식으로 반문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어쩌면 나는 연애에 있어서는-남녀 간에 가져야 할 어떤 감정적인 능력이 부족한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하고요.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곧장 두려움에 몸서리치곤 합니다. 모든 이성 관계에 있을 때, 해당 당사자(그러니까 여자 친구 말입니다)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으니까요.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둥, 여자 친구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런 다는 둥 하는 그런 것 말입니다. 그럴 때면 나는 단순히 여자 친구를 '만나야 하기 때문에' 만나는, 어떤 차가운 생각을 하고 머리를 굴리는 사이코패스가 된 나를 상상합니다. 무언가 수가 틀리면 바로 관계를 정리해버리고자 하는 사람 말입니다.
아니오! 그건 절대 아닙니다. 나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이번 연애를 끝내면서 깨달았습니다. 나는 절대로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고요. 여자 친구를 위해서 충분한 시간을 내지 못했다거나, 데이트 시간에 얼마간 늦는다거나, 좋아하는 말을 해주지도, 하지 말라는 일을 무심코 해버리는 것도, 작은 선물을 틈틈이 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연애를 함에 있어서 썩 좋은 태도는 아니지만, 그건 절대로 여자 친구를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걸요. 나는 비난받을 만한 일들을 충분히 해왔지만, 그건 절대 내 본심이 아닙니다. 절대로요.
나는 다만 놀라울 정도로 느려 터진 사람일 뿐입니다. 박자를 제대로 맞추지 못했을 뿐이에요. 이제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나는 절대 여자 친구가 듣던 드뷔시를 싫어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드뷔시를 충분히 듣기에는 시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이제는 막심한 후회만 남지만, 그때 같이 드뷔시를 들어주지 못한 게 후회가 됩니다. 실수로 라도 말한 '난 드뷔시는 별로야'라는 말이 어떠한 상처를 주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지금은 하루 종일 드뷔시를 듣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말했던 드뷔시에 대한 모든 것들을 곱씹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곡이라던지 곡에 대한 이미지 같은 것들 말니다. 그것들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몸에 응어리가 지는 기분입니다. 정밀한 물리에 의해 혈관을 지나는 피들이 응고되면서 콱콱 혈관을 막는 기분이랄까요.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나를 후회하게 만드는 건 감정들입니다. 같이 공감해주지 못한 감정들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공감해 줄 수 있는 감정들입니다. 아, 도대체 나는 어떻게 된 망나니인 건지. 내가 그때 했던 모든 말들을 후회합니다. 나는 다만 시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여자 친구의 그런 것들을 이해하고 마음속에서 진정으로 어떤 말들을 해줄 수 있는 용기가 솟아오르기까지에는, 나는 너무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남차친구로서 어렵게 꺼낸 그녀의 고민들을 들어줄 수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무지의 소산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녀가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자만 때문에요. 하지만 정작 생각을 하지 못한 건 내쪽이었고, 비로소 시간이 지나 그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헤어진 다음에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조금 더 오래 사귈 수 있었다면, 그 모든 역경을 딛고 만약 조금 더 관계를 지속해 나가기로 했다면 우리는 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안개가 되어 뿌옇게 가득 찹니다. 만약 내가 그녀를 이해했더라면, 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이런 가능성이, 만의 하나-십만, 백만분의 하나라는 가능성이 올가미가 되어 나의 목을 졸라옵니다. 어쩌면 그녀는 나의 변한, 성장한 모습에 미소를 지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서로의 성장에, 서로가 서로에게 맞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미래를 꿈꿀 수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저는 그 모든 것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느린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알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죠. 이제 떠나버렸으니까요. 내가 변하기 위해서는 120일 남짓한 시간이 필요하고, 그 정도의 시간은 모두를 떠나보내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음울한 깨달음을 남겼습니다. 나는 부서져버린 옛 유적에 걸쳐 앉아 폐허를 바라봅니다. 그곳에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이 있었는지 곱씹으면서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먼지가 유적 위에 가라앉아야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커플링이 있던 부분을 계속 만져보게 됩니다. 처음 커플링을 맞췄던 날, 손가락이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커플링을 엄지 손가락으로 계속해서 돌려대었죠. 여자 친구는 그만 좀 만지라고, 반지에 때 탄다고 타박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계속해서 반지를 만져대었죠. 이제 습관처럼 반지를 만지려고 엄지를 약지에 대어 보지만, 반지는 이미 그곳에 없습니다. 나는 그때마다 화들짝 놀랍니다. 새삼 헤어진 것을 깨달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제기랄 하고, 작게 읊조립니다.
우울한 마음에 부끄러운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행여 실수로라도 긴 이야기를 읽으셨다면, 작게 실소(失笑)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뭐 이런 병신이 다 있지 하고 비웃어주시기 까지 하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림/ 이재삼, 달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