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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엔데 Jul 14. 2019

행복한 눈물

    쥐새끼가 천장을 우다다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자, J는 불현듯 브로콜리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TV나 유튜브에서 의미 없는 먹방을 본 것도 아니었다. 평소 브로콜리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브로콜리가 들어있다고 하면 - 카레나 빵 같은 것에 말이다- 스푼으로 조심스럽게 그것을 한쪽에 치워놓는 편에 속했다. 

    하지만 J는 그날따라 브로콜리가 엄청나게 먹고 싶었다. 브로콜리 말고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초장이나 소스 없이, 데치지도 않고 생 그대로의 브로콜리를 말이다. J는 단단한 줄기 쪽을 두 손으로 쥐어잡고, 고슬고슬하게 생긴 이파리를 잡아 뜯어먹고 있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입에 군침이 돌았다.

    J는 브로콜리를 사러 마트에 갈 채비를 했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밖의 온도를 확인했다. 잠깐 사이에 손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추웠지만 별 수는 없었다. 5평 남짓한 원룸 안에는 가볍게 입고 나갈 만한 따뜻한 옷이 없었으니까. 헤질대로 헤진 점퍼는 이런 식으로 입다가는 정말로 '낡아서 입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도 있었다. 옷을 아껴입어야 했다.

    그래서 J는 봄이나 가을에 입을 법 한 츄리닝을 위아래로 입었다. 소매 부분이 낡아서 안감이 비쳐 보이고, 무릎이 튀어나와서 외계 생명체처럼 보이는 츄리닝이었다. 그래도 간단하게 장 보러 간다면 용납이 될 만한 패션이라고, J는 손거울을 전신에 비춰보며 생각했다.

    당장 손에 잡히는 돈은 이천 원이었다. 지갑에는 딱 그 정도 돈이 있었다. 평소 브로콜리는커녕 야채도 잘 먹지 않기 때문에 브로콜리 가격이 어떠한지, 한 덩이로 파는지, 크기는 어떠한지에 관해 전혀 몰랐다. 물론 J가 걱정한 것은 브로콜리가 이천 원이 넘을까 말까 한 것이었다. J는 필통과 서랍장과 침대 밑을 뒤졌고, 거기서 삼백원가량을 더 찾아내었다. 

    J는 이천 삼백 원을 들고 마트로 향하였다. J의 머릿속에는 온통 브로콜리 생각이 가득했다. 컨버스화를 뚫고 밑창부터 냉기가 올라왔지만, 브로콜리 생각을 하니 추위도 제법 견딜만하였다. 종종걸음으로 마트로 향하던 도중에 습관처럼 부동산 유리창에 걸린 아파트 매매가를 쳐다보았지만, 평소처럼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본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서둘러 마트로 향했다. 브로콜리가 아주 먹고 싶었으니까.

    저녁의 마트는 제법 붐볐다. 그곳은 뒤늦은 장을 보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더러는 아이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무료한 표정이었다. J는 따분한 표정으로 먹을걸 쓸어 담고 계산을 하러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임에 나오는 일꾼 같다는 생각을 했다.

    J는 마트 천장에 붙어있는 야채 코너를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야채 코너는 이상하게 아저씨들만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야채 코너가 그들에게 어떤 위안이라도 주는 것일까. J는 이런 의문을 갖다가 브로콜리를 발견했다. 브로콜리는 창문이 없는 냉장칸 맨 위에 있었다.

    브로콜리는 한 송이에 사천 팔백 원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줄기를 제거하고 하얀 플라스틱 용기에 담아 랩으로 소분 포장한 것도 팔고 있었다. 그것의 가격은 천팔백 원 정도였다. J는 얼핏 손을 하얀색 용기로 뻗었다가 조심스럽게 멈추었다. J가 원하는 것은 이런 브로콜리가 아니었다.

    J가 원하는 것은 줄기가 달린 큰 브로콜리였다. 더 이상 타협은 없었다. 흰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난도질당한 브로콜리는 역겨워 보이기까지 했다. 우연히 야채 코너 구석에 할인 판매대를 발견하고 J는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썩어 물러가는 야채 더미 사이에서 누렇게 뜬 브로콜리 덩어리를 발견했다. 무려 50% 세일을 하고 있었다. 이천 사백 원.

    백원이 모자랐다. 하지만 J는 브로콜리를 두 손으로 단단하게 들고 계산대 앞으로 향했다. 앞에 있는 한 아이가 두 손으로 브로콜리를 공손하게 잡고 있는 J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J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이천삼백 원이냐 이천사백 원이냐가 J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사천 팔백 원의 절반이 이천 삼백 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마침내 계산대에 다다랐고, J는 이천 삼백 원을 내밀었다. 계산대의 아주머니는 J가 내민 이천 삼백 원을 받았다. 이리저리 뒤적여 보았지만 아무래도 이천 삼백 원이다. 이천 사백 원에서 백 원 모자란 금액이다. 아주머니는 J를 힐끗 쳐다보고 또 J가 내밀었던 브로콜리와 J가 입고 있던 츄리닝을 쳐다보았다. 어쩌면 아주머니는 J의 영혼을 꿰뚫어 보았는지도 모른다.

    계산대의 아주머니는 아무 말 없이 J에게 브로콜리를 건네주고, 계산대를 열었다. 지폐는 지폐 칸에, 동전은 정리하는 손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아주머니는 현금을 오랜만에 받아보는 듯했다. 그러는 사이 J는 브로콜리를 두 손으로 집어 들고 마트 밖으로 나왔다. 별다른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돌아오는 길은 아까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추웠다. 어쩌면 별 다른 차이는 없지만, 브로콜리가 손에 있기 때문인지도 더욱 추운 것인지도 모른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브로콜리를 잡은 손이 하얗게 떴다. 발걸음이 거의 움직여지지 않을 정도라고,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찰나 J는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한 J는 브로콜리를 침대에 던졌다. 옷을 벗고 불을 껐다. 그리고 팬티 차림으로 침대에 앉아 얇은 이불로 몸을 감쌌다. 두 팔을 이불 밖으로 뻗어 주섬주섬 브로콜리를 찾았다. 브로콜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J는 어둠 속에 앉아서 두 손으로 브로콜리 줄기를 꽉 잡았다. 브로콜리 이파리에 머리를 박고, 입을 우물거렸다. 천장에 쥐새끼가 지나다니는 소리와 함께.  


사각사각사각사각.

    

그림/ 로이 리히텐슈타인, 행복한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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