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끄적끄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군 Sep 05. 2019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의 사랑 나의 할머니

 내가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뒤부터 어머니가 일을 하기 시작해서 나는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그 시절의 나는 방안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어머니가 나를 데리러 오면  쪼르르 나와서 "안녕하세요"하고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던 아이였다고 한다. 이걸 제외하더라도 내가 기억하는 어린시절의 많은 시간은 대부분 할머니와 함께 살던 시기의 기억으로 채워져있다. 그리고 IMF가 터진 후로 나는 할머니와 따로 살기 시작했다. (얼마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내가 할머니와 살았던 시기를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내 기억보다 훨씬 더 짧아서 조금 놀랐다.)


 다시 할머니와 살게 된 건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였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는 다단계에 빠져서 집을 나갔고 (술에 취해 유리창을 부수고 어머니를 노려보는 친부에게 살해당할 것이 두려워 신발도 제대로 못챙겨서 도망쳤다는 것을 들은건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친부는 제대로 된 일을 하겠다며 안산에 있는 지인의 공장으로 갔다. 이른 등교와 늦은 하교시간마다 항상 웃으며 나를 배웅하고 맞이해주시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그럭저럭 잘 버텼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수능을 본 뒤 난 “대전에 있으면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아”서 학자금 대출을 받고 연고도 없는 서울로 무작정 떠났다. 


 서울에 올라온 후 1년에 딱 2번, 명절 때마다 할머니가 계신 대전으로 내려왔다. 하루는 고향에 내려온 김에 할머니의 어린시절에 대해 들어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할머니가 나의 할머니가 되기 전, 개인의 삶이 궁금했다. 할머니 개인으로서의 삶을 들어보려고 했지만 “우리 때는 가난해서 꿈이고 뭐고 동생들 내팽개치고 놀러나가고 싶은 생각 밖에 없었어.” 라고 하셨다. 어린 동생들을 놓고 놀러 나갈 수 없으니 동생을 들쳐 업고 나가서 고무줄 놀이를 하다가 등에 업혀있는 동생이 울면 짜증이 나서 몸을 막 흔들면서 달래줬다고 한다. <검정고무신>에 나올 것 같은 에피소드를 풀어놓으시곤 깔깔대며 엄청 웃으셨는데 나는 따라웃지 못했다. 


 남동생을 들쳐 업고 고무줄 놀이를 하던 <검정고무신> 시기가 끝난 후에도 결혼 전에는 동생들 업고 키우면서 살림하는 보호자 역할, 결혼 후에는 자식들 키우며 살림하는 어머니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정육점을 건사하며 장사꾼으로서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보호자와 어머니로서의 역할도 할머니 개인의 삶이지만 누군가를 양육하고 살림하고 일하는 것을 제외하면 전혀 말씀하지 못하셨다. 뭔가 소소한 개인의 역사 같은 것이 당연히 발굴될 것이라 생각한 내가 너무 안일했다. 대전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 전 항상 할머니를 안아주기 시작했는데, 그게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후인지 이전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1년에 딱 2번, 명절 때마다 내가 가족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해 거의 의무감으로 대전에 있는 할머니 집으로 갔지만,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타러 가는 내 뒷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계시는 할머니를 보고 있자면 뭔가 뭉클해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가끔 할머니에게 전화가 와서 보고싶다고 항상 기도하고 있다며 사랑한다고 말해주실 때, ‘이게 가족에게 느낄 수 있는 종류의 사랑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자타공인 정없기로 유명한 내게도 약간의 따뜻함이란 것이 있다면 그건 할머니의 영향일 것이다.


 어차피 가족이라는 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종류의 인연이 아니다. 태어나 보니 이미 맺어져 있는 관계라서 더 애틋할 때도 있지만 그래서 더 끔찍할 때도 있다.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동안 나는 대체로 끔찍한 일이 더 많았고, 그렇게 어떤 시간은 쌓였지만 어떤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성장하는 동안 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건 가족과 나를 정서적으로 분리하는 노력을 필사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 중에 나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건 정말이다. 


 애초에 많은걸 바라지 않았다. 우리 할머니가 항상 건강했으면 좋겠고, 마지막 순간까지 행복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항상 말씀하시는 "교회 다니고 참한 처자 데리고 와서 결혼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은 결국 들어주지 못했다. 사실 살아계셨어도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긴 했다. 나는 사후세계 같은건 믿지 않아 죽고나면 끝이고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할머니는 천국에 가셨으면 좋겠다. 그렇게 열심히 교회도 나가도 매일 기도도 하고 관에 꽃이랑 십자가도 넣었으니 그래도 되겠지. 

매거진의 이전글 큐레이션의 시대에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에 대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