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보니 불법의 역사
2002년 3월, 박찬욱 감독의 신작인 <복수는 나의 것>이 개봉했다.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모두 그의 차기작을 기다렸고, 나 역시 개봉 첫 주말에 친구와 함께 바로 서라벌 극장으로 달려갔다. (멀티플렉스가 생기기 전에는 소위 ‘뚫리는’ 극장에 보고 싶은 영화를 봤다) 그렇게 극장 안을 가득 메운 채 이후 복수 3부작의 1부가 될 영화는 시작됐다. 그리고 두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어어부 프로젝트의 기괴한 음악, 끔찍한 고어표현, 본격 꿈도 희망도 없는 무정한 세계가 펼쳐졌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쏟아지는 온갖 욕설과 악평들 사이에서 나와 친구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우리가 얼마나 쩌는 영화를 본 것인지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마침 당시의 나는 무라카미 류의 작품과 일본 고어영화에 빠져있었다.)
몇 년이 지난 후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올드보이>가 개봉했다. 심지어 엄청난 영화라는 평단의 극찬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때는 대전에도 CGV가 생겼고 고등학생이던 내가 18세 관람가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미국의 R등급은 보호자가 있으면 18세 미만이어도 동반 가능하다 길래 아빠한테 극장에 문의해달라고 까지 했었으나 한국은 보호자가 있든 없든 얄짤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심지어 스포츠 조선에서 대종상 후보인 강혜정을 설명하며 “000 역할로 열연을 펼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바람에 스포까지 당해버려서 ‘뻐킹 다 망해버려라’는 마음으로 모든 걸 포기했다.
그렇게 시무룩한 시간을 보내다가 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갔었는데 세상에, 나는 <올드보이>와 <러브 액츄얼리>의 상영시간이 똑같다는 걸 발견했다. ‘그럼 러브 액츄얼리를 끊어서 올드보이 관으로 들어가면 되잖아!!!’ 떨리는 마음으로 알바생에게 표를 보여주고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올드보이>의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까지도 내가 앉은 자리에 누가 오거나 알바에게 걸릴까봐 전전긍긍 했었지만 다행히 그때는 상영이 거의 종료되던 추세여서 10명 남짓 되는 사람들과 함께 봤다. 영화가 끝난 뒤, 나는 온몸에 힘이 빠져서 좌석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신화적인 플롯, 기깔나는 액션, 화려한 미장센, 반복되는 요소들까지, 나는 <올드보이>라는 영화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어떤 영화에 이렇게까지 빠진 것은 아마 이 영화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시간이 쌓여왔고, 언젠가부터 나에게 영화는 그냥 밥먹 듯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전 영자원에서 오랜만에 <올드보이>를 봤다. 2013년에 10주년 기념 재개봉 이후로 처음보는거니 거의 3년만인 듯?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아가씨>를 제외하면 박찬욱 감독의 모든 영화를 최소 3번 이상씩은 봤는데, 그 중 <올드보이>는 나에게 유독 더 애틋한 구석이 있다. 유정이한테 “올드보이 처음 본다니 너무 부럽다”고 드립을 치기도 했지만, 이제와서 다시 리듬감이나 플롯에 의아한 부분이 느껴지기도 했다. 간만에 <올드보이>를 보고나니 내가 영화를 사랑하게 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 중 한명인 박찬욱 감독에 빠지게 된 계기가 떠올라서 주절주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