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도착지, 카오산
공항 입구로 나오니 카오산 로드라고 쓴 팻말이 보였다. 어림짐작하건대 그곳이 우리의 첫 목적지인 카오산 로드로 가는 티켓을 파는 곳이다. 막상 표를 샀지만 버스는 어디서 타는지, 왜 바로 버스를 타지 않고 기다리라고 하는지 영문을 모른 채 아들 옆에 서 있었다.
표를 팔던 여자는 아들이 묻는 말에는 건성 대답을 하고 또 다른 여행자에게 표를 파느라 분주했다. 다른 사람도 우리처럼 표를 사고 기다리고 있으니 불안이 옅어지고 위안이 되었다. 그들의 목적지가 우리와 같다는 이유만으로도 턱없는 동지의식까지 생겼다.
기다리면 버스가 온다고 했단다. 얼마를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왜 기다려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기다렸다. 그러나 눈치가 빨라야 절간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고 했기에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파악하느라 마음이 바쁘다.
공항 로비에 30분쯤 서 있으니 한 남자가 나타나고 버스표를 판 여자는 그를 따라가라고 손짓을 한다. 밖으로 빠르게 걸어 나가는 남자를 놓칠세라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붙잡고 뛰다시피 걸었다. 공항 밖은 비가 오고 있었으나 우산을 꺼낼 틈이 없다. 오롯이 비를 맞으며 길 몇 개를 건너자 미니버스가 있는 곳에서 남자의 발걸음은 멈추었다. 안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타고 있었다. 우리를 포함해 같이 기다렸던 사람이 몇 명이 더 타니 빈자리가 없다..
배낭을 차 안에 구겨 넣다시피 하고 버스는 밤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다른 곳에서 승객을 태웠고 우리가 탄 곳은 마지막 경유지였다. 정해진 운행시간 같은 것은 없고 만석이 될 때까지 승객은 마냥 기다려야 하며 우리가 탄 차도 민간 사설 버스인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렇다면 더욱더 무사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기만 간절하게 빌어야 한다. 비가 오는 밤길에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 안에서 야경을 볼 여유보다는 안전에 대한 불신으로 주눅이 든다.
방콕의 밤은 비와 화려한 불빛이 만나 더욱 눈부셨다. 천사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끄룽 텝이 원 지명인데 방콕이란, 외국인이 사용하는 영어 지명이란다. 낯선 이방인에게도 비는 친숙한 존재로 다가왔다. 유리창에 빗방울이 고였다. 방울은 방울끼리 만나 몸체가 커지자 주르르 아래로 흘렀다.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를 확인시키느라 어딘가에 떨어지고 결국은 물이 되는 비를 보며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같은 곳을 향하고 있음이 경이로웠다.
우주에 존재하는 생물체는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의 생존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거다. 대한민국 외교부에서도 치안과 위생 등에서 잠재적으로 위험요소가 있다고 '여행유의' 지역으로 지정한 곳이지만 내 곁에는 아들이 있다. 이 사실을 잠시 잊고 혼자인 냥 주름졌던 마음은 활짝 펴졌다. ‘주눅 들지 말자.’ ‘겁먹지 말자.’ ‘맞서자.’ 빗방울의 향연을 보며 마음을 다잡는다.
보름 전부터 커다란 플라스틱 바구니를 거실 한쪽에 놓아두고 필요한 물품이 생각날 때마다 바구니 속에 넣었다. 그렇게 모인 생필품을 둘의 배낭에 나누어 담고 무게를 재보니 아들 것은 15킬로, 내 것은 12킬로다. 짐을 덜어내어 내 배낭에 옮기려 하는데, 된다, 안 된다, 설전을 벌이다가 내가 지고 말았다. 청년인 아들이 3킬로쯤 더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들의 무게를 덜어주고 싶은 것은 엄마의 마음이다.
여행 배낭은 등산 배낭과 다른 점이 있다. 주머니가 겉으로 돌출되지 않아 사용의 편리함보다는 안전에 더 비중을 둔다. 아들은 내게 배낭을 메어보라고 했다. 키와 맞게 상단 칸의 짐을 조절하고 무게의 평형도 조절해준다. 어깨끈과 허리끈도 조이고 풀며 가장 편하게 메고 다닐 수 있게 마지막 점검을 해줬다.
눈물샘이 슬그머니 열렸다. 감정에 따라 눈물의 맛이 다르다고 하는데 이 눈물 맛은 어떤 맛일까. 자상하다고 말하긴 단순하고 자식의 부양을 받는 느낌이라면 어색하나 분명한 것은 감동의 눈물이다.
자크의 손잡이 구멍을 연결하는 자물통까지 채우고 나니 어지럽게 널려 있는 가재도구와 비교가 된다. 물방울은 방울끼리 모였다가 제 무게를 버티지 못할 때쯤, 미련 없이 아래로 흐른다. 지구에 생존하는 생물 중에 쓸데없는 생각과 물건을 마음대로 버리지 못하는 유일한 존재는 사람뿐이다. 켜켜 쌓고, 움켜주고 채워가며 집이 비좁다고 애매한 집 탓만 한다.
인천공항과 베트남 노이바이 공항을 경유해 태국 방콕의 수완품 공항을 거처 카오산에 도착했다. 집에서 버스를 타고 나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시차 2시간을 포함하여 20시간이다. 구글 지도 어플은 예약한 슬립 윈드인, 이란 숙소를 금방 찾게 해 주고 항공권과 숙소도 어플을 이용하면 예매가 되니 세상이 어디건 못 가랴 싶다.
창문 없는 비좁은 방이지만 창문이 없어서 오히려 다행이다. 창밖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아 전날 분의 밤잠까지 푹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첫날부터 예기치 않는 상황을 만나고 여행 정보와 실제가 맞지 않는 일을 겪었다. 그러나 여행은 현실보다 더 아픈 현실을 자초해 겪는 행위가 아니던가. 기쁘게 맞을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