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들은 떠났다

바쁨을 즐기다

by 수헌 한옥자


바쁘다, 나중에 밥이나 먹자, 는 말은 슬프다. 회피와 무책임의 의도가 다분히 숨겨진 말인데다가 누구나 쉽게 내뱉기 때문이다. 무심히 내뱉다가 일상화된 말이나 설령 바쁠지라도 나중에, 라는 말은 상대를 슬프게 한다. 절박하게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나중으로 미루지 않을 것이며 바쁜 가운데 틈은 내기 마련인데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고백을 용감하게 잘도 한다.

치열하게 살다가 주어지는 휴식은 가볍게 달달한 맛이 아니다. 혀로 느끼는 단맛과는 다른 가슴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달콤함이다. 열심히 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똑 같이 시간을 주어져도 각각 다른 말을 한다. 같은 시간이 주어져도 누구는 지루하다고 하고 누구는 가는 시간이 아깝거나 모자라다고 하니 주어진 시간의 가치는 본인이 만들어 가는 것이며 시간은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아들과 떨어져 살던 몇 년 동안 집에 있을만한 시간을 골라 안부 전화를 하곤 했다. 그러나 예상은 걸핏하면 틀렸다. 말을 길게 하면 눈치 없는 어미가 될까 봐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고 하면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라는 말이 언제나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안부를 묻는 쪽은 거의 내 쪽이다. 정녕 바빠서 그랬다면 다행인데 습관일 수도 있고 따로 살면서 생긴 존재감의 부족일 수도 있다. 사소한 습관이 자기를 만들고 그것이 인간관계로 이어졌을 때 장애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고, 품 안의 자식이라는 말은 얼마나 야속한가.


우돈타니 공항에 도착하여 예약한 ‘파라다이스 호텔’에 왔을 때 숙박요금보다 월등한 고급스러운 규모에 놀랐다. 주위 풍경까지 아늑하여 하룻밤을 쉬어 가기는 넘치도록 탁월했다. 모시길 원하지 않지만 기어이 모시고자 하는 아들은 매번 잠자리 고르기에 고집스럽게 신중했다.

해지는 저녁에 푸른 물과 노을빛이 겹쳐 안온하기 짝이 없는 풀장에서 수영으로 피곤을 풀고 어두워진 거리로 나섰다. 인도는 온전한 곳이 없었다. 보도는 깨지거나 주저앉고 가는 곳마다 함몰된 곳도 많아 밤길을 다닐 때는 매우 조심해야 했다.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엔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라 무엇을 본다거나 하기보다는 잠시 쉬어 가는 벤치처럼 선택한 곳이다.


태국 북동부 지역에 있는 우돈타니는 인구 16만 명 정도로 중국이나 라오스, 베트남을 가기 위한 관문이라고 한다. 조용하고 차분해서 휴식하기에 좋았다. 거리도 한산하고 현지 사람을 상대로 한 점포나 편의시설이 대부분이고 오히려 우리가 그들의 구경거리였다.

나이트 마켓에 가서 군것질로 저녁 식사를 대신하고 아침식사는 호텔의 조식으로 먹었다. 마치 여러 날을 머문 사람처럼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매번 낯선 곳에서 잠자리를 펴도 깊은 잠을 잤다. 강렬한 햇빛을 받으며 시내를 다니는데 더위에도 아랑곳없이 이래도 되나 싶게 마음이 평화로웠다. 항상 무엇을 했지만 쫓기지 않았고 바쁘지도 않았다.

버스표를 예매하기 위해 터미널을 들렸더니 출발 한 시간 전에 와야 표를 판다고 했다. 더운 날씨에 헛걸음을 하면 짜증도 날만한데 그렇지 않다. 오늘 중으로 목적지로 가면 되는 것이고 어디서 무엇을 하건 우리는 지금 여행 중이다.


여행을 떠난 날부터 몇 배로 시간을 늘려 쓰고 있다. 비행기를 타거나 버스를 타고 이 나라와 저 나라의 국경을 넘나들고 걷는 거리도 매일 10킬로가 넘는다. 더위를 피해 쉬는 찻집이나 버스 안에서 글을 읽거나 쓰는 것도 평소보다 더 집중한다. 가고 싶은 곳을 가면 되고 배가 고프면 인근 식당에서 입맛에 맞을만한 것을 찾아먹고 잠은 하루 전날 예약한 곳에서 자면 된다.

오전에 여유롭게 거리를 걷다가 오후 2시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라오스로 왔다. 바쁘게 움직이지만 전혀 바쁘지가 않다. 24시간이 여유롭다. 아니 마음이 느긋하다.

버스 안은 에어컨을 가동 중이나 오는 내내 땀에 젖었다. 핸드폰의 유심 카드는 운영 시간이 지나 다음 날을 기다려야 했고 라오스 화폐로 환전할 곳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마침 아들의 폰 배터리도 수명을 다하고 있다. 달랑 이름만으로 숙소를 찾아가야 한다. 유심카드가 없어 구글 지도를 사용할 수가 없기에 현지 경찰한테 숙소 위치를 물어봐도 엉뚱한 말만 한다.


“당신 경찰 맞아?”

큰소리로 말을 하면 알아들을까 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말을 해놓고도 내가 웃었다. 빗물처럼 땀이 흐르는데 웃음이 나는 것도 우스웠다. 뚝뚝 기사에게 숙소 이름을 알려주고 태국 동전을 모두 털어주고 태워달라고 하니 바로 코앞에 있던 숙소 근처를 여러 바퀴 돌다가 내려준다. 그 또한 웃을 일이다.

숙소에 배낭을 두고 나와 해가 지는 서쪽 방향을 향해 걸어가니 메콩 강이 보였다. 강변에는 여행객으로 가득 찼다. 말로만 듣던 중국 티베트에서 발원한 강이다. 무리 틈에 섞여 강변의 석양을 가슴으로 품자 뜨거움이 올라온다.

마음을 데어도 좋았다. 종일 비지땀을 흘렸고 낯선 곳에서 애타게 숙소를 찾아 헤맸으나 여행지에서 맞는 노을은 그쯤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해주었다. 하늘에 별이 떴지만 냉큼 강변을 떠나지 못했다. 노을빛이 물든 강물이 발목을 붙잡더니 다시 별빛이 잡는다.

마음을 잡히니 꼼짝 못 하였다. 나는 전혀 바쁘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엄마와 아들은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