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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끗 Mar 08. 2020

진정으로 당신을 아는 타인은 없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진정한’이 붙은 관계를 추구한다.

‘참되고 애틋한 정이나 마음’.

그것이 사전적 의미다.


조금 더 쉽게 풀어보자면,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관계는 내 생각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을 얻는 것이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변명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

나를 끝까지 믿어주고 떠나지 않아, 변하지 않는 것.

그런 굳건하고 변치 않는 안정감을 주는 관계.


진정한 부모.

진정한 친구.

진정한 애인.


우리는 목마른 상태로 진정성 있는 관계를 찾아 우물을 판다.


그런데 삶에서 많은 경우를 마주한다.

목마름을 참으며 열심히 땅을 팠는데, 아무리 파도 마른땅만 보일 때가 있다.

어느 순간 물이 퐁퐁 솟아올라 풍성한 우물인 줄 알았더니, 갑자기 말라버릴 때도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배우도 없고, 나를 그토록 애타게 쫓아오는 사람도 없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따분하고, 서로 노력을 해야만 하는 관계가 존재할 뿐.

영원한 사랑도 없고, 내 갈증을 해소시킬만한 관계도 없고 시간이 지나며 자꾸 늘어만 가는 것은 상처뿐이다.


불만족스러운 삶이 이어지고, 결국 관계에 관해 회의적인 사람이 된다.

시간, 물질, 그리고 공을 들여 사람과 관계 맺는 게 귀찮아지고 차라리 평생 혼자인 게 낫다며 자위한다.

그리고 진정한 관계를 포기해 버린다.

 나아가, 관계 자체를 통째로 포기해 버린다.


하지만 섣불리 포기하기 전에 고려해 볼 것이 있다.

내가 원하는 ‘진정한 관계’가 이 세상에 존재할까?


일단 나부터 들여다보자.


나는 나를 완전히 알고 있을까?

내가 나를 향해 ‘내가 이런 면이 있었다니’라고 느낄 정도라면, 하물며 내 생각도 감정도 읽을 수 없는 타인이 나를 완전히 알 수 있을까?


뻔한 대답이지만 답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는 나도 나를 정확히 모르겠는데, 어떻게 타인이 알 수 있을까?

나를 뱃속에 열 달 동안 품었던 엄마도, 어렸을 적부터 함께해 온 친구도, 매일을 함께 보낸 애인도 당신을 완전히 알 수 없다.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는데, 어찌 타인에게 그것을 바랄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 바라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다.


내 이성과 감정은 늘 동일한가?


정확히 프로그램되어있는 기계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사람이라면 평소보다 감정적인 날도 있고, 이성적인 날도 있다.

판단력이 흐려지는 날도 있고, 실수하는 날도 있다.

그렇다면 나의 그 ‘진정한’ 사람도 그럴 수 있다.


이곳까지 생각이 닿았다면, 다음으로는 ‘진정한’이라는 단어를 내가 가진 관계로부터 한번 분리시켜 보자.

부모, 친구, 그리고 애인.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숨 쉴 구멍을 조금 선물해주자.


관계로부터 내가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져보자.


그들에게 애정을 쏟아붓는 것을 통해 내가 뿌듯한 마음을 얻는다면, 그들을 만남으로서 내가 지혜와 즐거움을 얻는다면, 그리고 내가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힘을 얻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괜찮다.

그 이상이 없어도 괜찮은 관계다.

내가 얻었으니, 그만하면 됐다.


만약 타인이 나를 해치고, 관계로 인해 내가 망가져 간다면 그건 더 이상 관계를 이어나가기 전에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관계지만, 만약 내가 얻는 게 있고 나를 더 낫게 만든다면 충분히 괜찮은 관계다.

너무 기회주의인 것처럼 보이는가?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관계를 무조건 잘라내라고 하는 것 같은가?


당연히 그건 아니다.

내가 치르는 희생 없이 관계가 발전되길 원한다면 그것은 뜬구름 잡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아니면 나에게 열렬한 팬이 있다는 소리 거나.

지혜와 충분한 고려와 판단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내가 희생을 함으로써, 내가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바보가 됨으로써, 내가 기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말하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자면, 내가 내 몫의 식사를 조금 포기하고 소중한 사람에게 나눔으로써 그가 덜 배고플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하다면 그것만으로도 되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이상으로 그리는 관계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적당히 즐거움과 행복을 주는 관계가 존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다.

굳이 내 속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음을 모두 털어놓지 않았지만 적당히 즐거운 식사와 함께 즐거운 대화가 그 사람과의 만남에 있어서 팍팍하기만 하던 마음이 조금 부드러워지고 따스해졌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 삼삼한 관계가 인생에 몇 존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인생이다.

내 기준에 부합하는, 내가 이성적으로 그리는 진정한 관계가 내 삶 속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충분하다.


특별하고 절절할 것 없는 적당한 관계여도 괜찮다.

평범하디 평범한 이 삶에 맛깔나게 쳐져 있는 양념과 같은 관계가 존재한다니 다행이지 않은가?

내 인생에 케첩처럼 자극적인 맛은 아니지만, 요리 위에 살짝 뿌려진 허브처럼 잔잔한 향을 내는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충분하다.


연기와 잘 짜인 각본으로 이루어진 드라마보다는 현실에서 직접 부딪히고 느낄 수 있는, 진정성 있는 다큐멘터리가 훨씬 낫지 않을까?

선택은 당연히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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