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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끗 Aug 22. 2020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언젠가 나는 내가 모든 사람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었다.

모든 사람의 말에 담겨 있는 의미, 그리고 표정이나 몸짓에서도 그 사람의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모든 것을 관찰하고 의미 부여하는 예민함은 양날의 검이다.

상대를 관찰하고 분석해서 상대방과 나를 위해 지혜롭게 사용할 수도 있는 장점이 되기도 하면서, 반대로는 예민함으로 얻은 정보에만 생각이 사로잡혀 과도한 분석까지 끌고 간다면 나를 굉장히 괴롭게 하고, 결국 나의 인간관계를 파괴시키기도 한다.


나는 한때 내 예민함에 도취해 나는 모든 사람의 생각을 파악하고 있다고 착각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말을 했을 때, 그것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그 사람의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 하다 보면 나는 어떠한 결론에 이르렀고, 나는 그것을 사실로 간주하고 그다음에 관계를 이어나갔다.


누군가에게 내가 어떠한 상황에 대해 분석하고 생각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 사람이 이해를 해주지 못하면 나는 그 사람이 상대방의 말 너머에 담긴 뜻을 파악도 못하는 둔한 사람이라고 치부해 버리고는 했다.


단어 하나에, 찰나의 눈빛에, 그리고 몸짓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나는 그렇게 복잡하고 괴로운 생각을 이어나갔다.

사실 그 생각의 끝은 언제나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나, 싫어하나에 이르게 되었고 상대방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혼자서 답을 얻을 수 없는 결론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대개 나를 싫어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고, 설령 나를 좋아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도 시간이 지나며 보게 되는 상대방의 다른 모습에 크게, 그리고 지나치게 실망을 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 말이다.

그렇게 홀로 큰 상처를 입고 나면 나는 쩔쩔매다가도 ‘흥, 나도 너 필요 없어’라고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며 그 사람으로부터 등을 돌리고는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는 어느새 폐쇄적인 성격으로 변해 사람들을 내 손으로 끊어내고 있었다.

내게 실망을 안겨준 이가 내게 손을 내밀어도 나는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서 그를 보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결국 외톨이가 되었더라.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좋은 관계를 맺기를 원하면서도, 자존심과 내 생각에만 사로잡혀 사무치는 외로움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이 되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게 노력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용기를 내어 노력했을 때 거절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내 나이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보니 정작 문제는 내게 있었다.


그 누구도 대놓고 내게 “네가 싫어”라고 말한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티 나게 마음을 드러낸 사람도 없다.


물론 예의를 중요시하는 이 세상에서 직설적이게 말하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말이다.

또 분명 내가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해서 내가 떠나 온 사람들은 내게 친절하기도 했었다.


시간이 지나 나의 마음을 찬찬히 돌아보니,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나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나는 나를 미워했기에 모두가 나를 미워하리라는 전제를 무의식 중에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즐겁게 관계를 형성하는 게 아닌 ‘저 사람은 언젠가 나의 단점을 보고 나를 싫어하게 될 거야’라는 이상하고도 무지막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마음은 나를 사람들 앞에서 감추고 부자연스럽게 만들었고, 그 부자연스러움은 아마도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너무 미웠지만 한편으로는 또 가엾었기에 그 누구도 나를 싫어하면 안 된다라는 자기 연민적 생각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이 진짜 내 모습을 알게 되면 미워하리라는 믿음과 그 누구도 나를 싫어하면 안 된다라는 반대되는 생각이 늘 내 안에서 충돌했다.


또 나는 내가 모두의 생각을 읽고 있다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도 나의 생각을 완전히 모르고, 또 상대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창조주가 아니기에 결코 모든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없다.


그 사람의 저의나 생각을 내 멋대로 파악한다고 해서 나는 그보다 나은 인간이 되거나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니다.

결국 나는 그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다.


무조건 나 때문에 상대방의 표정이 안 좋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그 사람의 인생에서 주인공 병에 걸려서 그의 인생에 주인공 역할을 뺏으려 선을 넘어 침범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 사람의 삶에 어떤 힘든 일이 있는지 모르고, 단순히 피곤한 것일지도 모르는데 그의 표정이 안 좋은 이유를 모두 내게 향하는 것은 어쩌면 드라마 주인공 병에 걸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때,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딱히 짚을 수 없다면 나는 그의 마음을 내게로 다시 향하도록 만들 수 없다.

그가 나의 어떤 부분을 단점으로 여기며 떠나간다 해도, 사과하는 것 외에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고 또 그의 생각을 나는 바꿀 수 없다.


또 인정해야 했던 것은,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과 완벽하게 맞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정말 잘 맞는 사람은 극소수고, 사실 어느 정도 맞지만 안 맞는 부분도 존재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안 맞아서 괴로움 때문에 연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하는 관계도 종종 존재한다.


그런데 모두가 극소수로만 가지고 있는 그 범주에 들기 위해 나는 너무 애쓸 필요가 없었다.

물론 적당한 예의와 배려는 필요하지만, 미움받는 게 두려워 나를 감추면서 상대방을 위해 무조건 맞출 필요도 없었다.

말 그대로 극소수니 말이다.


그리고 호감도는 0이나 100, 흑백으로 단순하게 나뉘는 것도 아니다.

10 정도 좋은 사람이 있고, 70 정도 좋은 사람이 있고.

그러니까 0이나 마이너스만 아니라면 그래도 관계에서 꽤 선방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 가지는 타인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고 해서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증오하고 미워해도, 대다수의 사람이 나를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나의 관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타인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지만, 나는 나의 삶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객관적으로 나의 행동을 돌아보았을 때, 사람들의 비난이 타당하다 생각하면 나의 문제점이 되는 행동을 고치면 그만이다.

그렇게 고쳤고, 내가 나를 보았을 때 괜찮은 사람처럼 행동을 하고 있다면, 내가 나를 안아주면 그만이다.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이유 없이 비난받는 게 쉽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조차도 나를 짓밟아 버리고 하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면, 나는 평생 온전하고 완벽할 수 없는 타인의 사랑을 갈구하며 불행하게 사는 것 밖에 할 수가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가장 컸던 것은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에 내 생각을 덧입혀 사실을 왜곡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상대방이 말하지 않았는데 내 멋대로 내 해설을 입혀버리는 것을 멈추는 것은 어려웠지만 습관이 되자 점차 쉬워졌다.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내 해석이 이어지기 시작하면 나는 곧바로 그것을 차단해 버렸다.

그러면 문득 들었던 생각은 곱씹지 않으니 빠르게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렸고 그 생각은 내 안에 머물지 못하게 됐다.


그러자 밤에 누워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는 걱정에 사로잡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일 따위는 사라지게 되었다.

마음에 켕기는 것 없이 잠을 푹 자게 된 것은 보너스였다.


너무 모든 것을 알려 애쓰지 말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곧이 곧대로만 받아들이고, 내 멋대로 생각을 더 이어나가지 않는 것.

상대방이 표정이 안 좋고 행동이 달라지면 ‘오늘은 조금 피곤 한가 보다’나 ‘나를 불편해 할 수도 있지’라고 간단하게 생각하고 넘어가는 것.

다음이 더 나아질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인정은 하면서도 그 이상 파고들어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


모든 것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내가 한결 더 자유롭게, 또 즐겁게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인 것 같다.

언젠가 다시 내가 사실을 왜곡하고 상대방의 저의를 과도하게 분석을 하려 하기 시작할 때 이 글을 보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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