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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끗 Mar 23. 2021

진심으로 구하고 받아낸 용서는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진정 용서받아본 기억이 있다.

어언 7년은 지난 일이지만 그때의 감정은 생생하다.


용서받았다는 상쾌함도, 자존심 상하는 느낌도 없었다.

그저 수치스러웠을 뿐.

그 사람 앞에서 벌거벗다 못해 내 모든 수치를 꺼내 보여준 느낌이 들었다.


어린 날의 실수라 치부하기엔 내가 한 행동은 결코 옳은 행동이 아니었다.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사람들의 말에 휩쓸려 정의라는 이름으로 독한 말과 증오를 담은 눈빛을 아무 잘못 없는 이에게 쏟아부었으니 말이다.


그것이 내 오해라는 건 머지않아 알게 됐다.

그에게 향해했던 내 언행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 사람에게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미안했다.


사람들이 내게 전한 말속에 그 사람의 모습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짓을 저지른 사람이었지만 진상을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당했던 피해자일 뿐이었다.


그 당시 내 잘못을 깨달은 나는 내 마음이 편하자고 하는 사과는 일종의 2차 가해라 생각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 사람을 위해 사과하기로 했다.

물론 가해자가 할 수 있는 사과가 피해자를 완전히 위할 수는 없고, 어쩌면 가식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겠지만.

앞으로 우리는 서로를 무시하지 못하고 마주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기에 나는 그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해졌으면 했다.


나는 그에게 용서를 빌지 않았다.


용서해 주지 않아도 되니 그냥 내 잘못한 것을 들어달라고 했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 자존심 다 버린 나의 모습에 그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되었다고 했다.


나는 오해하게 된 과정, 그리고 그 이후에 저질렀던 내 잘못을 세세하게 읊으며 일일이 사과했다.

내가 멍청하다 비웃어도 좋다고 했다.

나 스스로도 내가 멍청했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마음 한구석에 두려움이 없잖아 있었다.

이 사람을 평생 괴롭게 만든 것이면 나는 어떡해야 하나.

그가 평생 자기의 삶을 미워하며 살게 만든 것이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런데 그는 미소 지으며 내게 용서하겠다, 이해한다 말했다.

그때 내가 얻은 것은 홀가분한 자유도 아니고 자존심 상한 느낌도 아니었다.

그저 수치. 무거운 수치.

땅 속으로 꺼져서 아무 곳에도 보이고 싶지 않은 수치였다.


나는 내가 감히 그보다 우월하다 생각했고 그를 판단하고 손가락질할 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비열하게 그리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위에 있는 건 그였다.

마음에 짐 하나 없이 환하게 웃으며 내게 용서하겠다 말하는 그가 정말로 하늘에 있으면 나는 지하 끝까지 내려간 느낌이 들었다.


그의 용서하겠다는 말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이었다.

그 이후로 그와 여태 잘 지내고 있다.

나는 피해자인 그에게 감히 다가가려는 시도를 할 수 없었지만 그가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고 웃으며 다가와주었기 때문에.


아, 아직도 생생한 수치심 덕에 한 가지 얻은 것은 바로 용서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깨달았다.

용서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이에게는 최고의 복수가 되면서 또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어 준다는 것을.


내게 잘못한 사람에게 복수심을 품고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는 했는데, 지금은 비교적 그들을 용서하는 게 쉬워졌다.

인간말종 같았던 내게 웃으며 용서한다 말했던 그 사람의 얼굴을 생각해보면 다른 사람들이 내게 저지르는 실수는 참 소박하다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한편으로는 감사하다.

더는 내게 미움이라는 독을 쌓아두지 않게 됐고 또 용서가 비교적 쉬워진 계기가 되었으니.

살면서 이런 수치심 한번 겪는 것도 꽤나 운 좋은 일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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