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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끗 Nov 06. 2021

감정의 굴곡이 반복될수록

최근에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끓어올랐던 일이 있었다.

분노, 미움, 환멸, 좌절, 그리고 실망.

상대의 일방적인 오해로 시작된 반복적이고 악의 가득한 언행을 통해 내 마음은 상처 입었고 그 이유가 전혀 오해의 소지가 없는 어떤 일에서부터 시작된 걸 알았을 때 감정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분노했다.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20대 초반 이후로는 처음 느껴본 듯하다.

나름 서른을 앞두고 감정을 어느 정도 조절할 줄 아는 어른이 됐다고 믿었는데, 내 분노는 멈출 줄 모르고 치솟았다.

분노 또 분노.

가슴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리고 속이 메스꺼웠고 새벽에는 겨우 한 시간 잠에 들까 말까 했다.


상대가 미웠다.

그가 오해하고 날 저주하고 그런 마음으로 내게 악의 가득한 말을 면전에다 할수록 나는 내가 오해했겠거니, 내가 뭔가 오해의 소지를 남겼겠거니, 되뇌며 나를 탓했었다.

그런데 여태 이유도 모르고 맞아왔던 화살에 악의라는 독이 가득 묻어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나니 반복적이고 의도적이게 날 괴롭혀 온 그가 너무 미웠다.


환멸이 났다.

그와의 관계에 더는 노력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환멸이 났지만 그와 쉽게 끊을 수 없는 관계이기에 나는 고민에 빠졌다.

단순히 끊어버릴 수 있는 관계였다면 난 이 문제를 끌어안고서 끙끙 앓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끊어버렸겠지.


나는 오랜만에 끓어오른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쉬이 사그라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몇 달, 몇 년, 아니 어쩌면 평생 그를 용서치 못할 거라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스 덕에 오랜만에 날 찾아온 위염으로 인해 칼로 누군가 배를 쑤시는듯한 고통에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나는 그를 미워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를 갉아먹는 걸 알았으면서도 쉽게 놓아지지가 않았다.

그는 날 향해 근 일 년간 반복적으로 수많은 악의를 보내왔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겨우 속으로만 이렇게 하는데, 라는 이상한 억울함이 내 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정작 어중간하게 착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건 나면서도.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지나자 거짓말 같이 활활 타던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미움이 조금 희미해졌다.

그리고 강렬했던 환멸은 조금 무뎌졌다.


아예 사라진 것도 아니고 그를 완전히 용서해서 전처럼 웃으며 그를 대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조금은 사그라들었고, 희미해졌고, 또 무뎌졌다.


당장 달려가서 그의 얼굴을 한대 치고 싶었던 감정이 그의 얼굴을 한번 째려보고 지나칠 수 있을 것만 같은 감정 정도로 가라앉았다.

아마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언젠가 그를 쓱 보고서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수 있게 되겠지.

아니, 어쩌면 나를 위해서라도 그를 용서하게 되려나.


길 가다 뺨 맞는 것과 같은 이런 황당한 일을 여러 번 겪게 되면서 깨닫는 것은 내가 감당 못할 것만 같은 이러한 감정의 굴곡이 있지만 분명히 모두 지나간다는 것.

되돌아보면 과거에 절대 용서하지 못하고 잊지 못할 것 같던 사람도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으니.

이렇게 감정의 굴곡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반복된 운동에 몸이 훈련이 되어 적응하듯이 내 마음도 조금씩 적응해간다는 느낌이 들고는 한다.

처음 겪었을 땐 분명 더 큰 굴곡을 느꼈고 더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은데.

절대 잊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이 일도 조금 지나가는 걸 보고 나니, 또 못 잊을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아프게 한 그가 사랑스러워 보이고 그를 소중한 사람처럼 대할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또 그를 평생 저주하며 지낼 일도 없을 것 같다.

아직 내 그릇은 그 정도가 아니기에 굳이 그를 사랑하고 포용해야겠다, 라는 마음은 함부로 먹지는 않기로.

일단 이 분노를 잊어주는 것만 해도 내 그릇이 충분히 크다.

이렇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모든 걸 맡기다 보면 언젠가 그를 마주하며 웃을 수 있는 날이 찾아올지도.


미움이라는 독을 내 안에 담고 있어 봐야 나를 해치니 그냥 시간에 동동 띄워 흘려보내 줘야겠다.


그냥 살아지기도 하고, 무뎌지기도 하고, 또 잊히기도 한다.

굴곡이 크면 클수록 또 더 힘들겠지만, 이렇게 여러 번 겪다 보니 요령은 없어도 이번에도 또 시간에 맡기며 흘러가겠거니,라고 생각하는 힘은 길러진 듯하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며 감정의 폭이 줄어 평정심을 잃지 않는, 어쩌면 감정에 무뎌져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크게 느끼지 못하게 되는 걸까.


의연한 어른이 되어가는 게 좋으면서도 조금은 애석한 이 기분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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