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랑끗 Oct 21. 2021

내가 아팠기에 타인의 아픔이 내게도 닿는다

그 사람의 입장에 서보기까진 결코 알 수 없는 게 있다.

그가 얼마나 아팠을지, 버티고 서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지,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이 그에게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그의 아픔에 근접하는 경험을 하기 전까진 나는 그의 아픔에서 비롯된 행동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는 했다.


‘나이를 저만큼 먹었는데 도대체 왜 저렇게 사리분별 안 되는 어린아이처럼 구는 거야?’

어렸을  상처가 깊은  알겠는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서도  얘기에 얽매여 있는 거야? 그게 모든  합리화해줄  없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실제로 내가 속한 무리 안에 있는 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었기에 나는 그를 힐난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를 오냐오냐, 거리며 용납하기만 했다가는 내가 지는 기분을 느낄  같아서 그에게 더 냉정히 굴며 거리를 두었다.


그는 10년도 더 지난 어렸을 적 받은 상처 이야기를 만나는 이에게 모두 전했다.

마치 자신의 잘못된 언행을 모두 이해해달라고, 너는 이해해야만 한다고 강요하는 것 같아 나는 그를 더 멀리했었다.

나도 내 삶의 무게가 있고 어려움이 있는데 굳이 내가 그의 상처의 무게를 함께 떠안아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


10년도 더 지났으면 툭툭 털어내고 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 같은데 왜 대책 없는 어린아이처럼 20대가 되어서도 제자리걸음 하며 여중생처럼 굴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당시에는 내가 꽤나 성숙한 어른이라 믿었기에 나는 동일한 상황이 내게 닥쳐도 잘 이겨내리라 생각했다.

나는 미성숙한 그 사람과 다르니까, 라며 확신했다.


그와 비슷한 일이 내게 닥치기 전까지.

뒤늦게 20대 초반의 나이에 나는 그와 비슷한 일을 겪게 됐다:

 속절없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의 이야기를 통해 들었던 것처럼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고 나는  경험  어딘가 고장나버린 인간처럼 살아가게 됐다.

도저히 예전의 내가 어땠는지, 어떻게 하면 무한히 밝았던 예전의 나처럼 돌아갈 수 있는지 모르겠더라.


난 한없이 우울했고, 그럼으로써 사람이 두려워졌고, 사람이 두려워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내게만 집중하게 되고, 내 상처에만 집중해 아이러니하게도 더욱더 나만 아는 사람이 되어가더라.

그러니 하나둘씩 주변 사람이 떠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곁이 남아준 이들도 지쳐가고 있었다.


아차, 싶었다.


내가 그토록 힐난하고 미워하던 그의 모습이 내 안에 고스란히 존재했다.

상처가 너무 깊어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고인물처럼 썩어가며 더 아픔에 젖어가는 내 안에 그가 보였다.


그제야 나는 그의 아픔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사람들이 본인을 버거워하는 걸 알면서도 잘 고쳐지지 않아 절망한 그의 마음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결코 남에게 피해를  그가 잘했다는 것도 아니고 그 당시의 내가 잘했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그의 아픔이 헤아려지면서 조금 더 이해해주지 못했던 게 미안해지더라.

내가 아픔으로써 그의 아픔이 드디어  마음에 닿았다.

그럼으로써 마음으로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우리는 공감하고 상대의 아픔을 헤아린다고 하지만, 그와 동일한 상황에 처해보지 않고는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해해’, ‘네 상황 알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엄청난 기만이었다는 걸 나는 내가 직접 겪으며 깨달았다.

차라리 그의 아픔이 내 마음에 생생히 닿지 않아 잘 모르겠다면 ‘난 잘 모르지만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라는, 조금은 불투명한 말의 위로도 담백하니 괜찮다.


내가 아파보았기에 타인의 아픔이 내게 생생하게 닿아 그를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래서 이렇게 지독하게 아파본 것일까 싶으면서도 아직도 상처가 낫지 않아 방황하는 내가 안쓰러워 한편으로는 왜 이런 불행이 찾아왔다 싶기도 하다.

어쩌면 이 아픔을 통해 내가 다른 이들을 배척하기보단 조금 더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아픈 경험이 값지다 하는 걸까.

지독한 아픔이고 아픔을 통해 잃는 것도 많기에 되도록이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러한 아픔이 찾아온다 해서 피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어차피 온 힘을 다해도 피할 순 없으니 말이다.


그저 그 아픔을 오롯이 견뎌내고 서서 내 마음을 울리는 다른 이의 아픔이 닿았을 때 그를 향해 따스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라도 하며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 진심 가득한 말을 해줄 수 있길.

누구나 아픔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며 또 내가 이해할 수 없다 해서 그의 아픔이 아무것도 아니라 치부하지 말기.


또 내 아픔이 타인에게 닿지 않는다 해서 섭섭해하지 말기.

그가 내 아픔을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한다 해서 내가 생생히 느낀 아픔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언젠가 내 아픔이 그에게 닿을 날이 올지도 모르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자.

 







작가의 이전글 수많은 타인들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