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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끗 Jan 09. 2020

동감이 아니라 공감

그 미묘한 차이에 관해

최근에 <책 읽어드립니다>라는 예능의 영상을 보다 인상 깊은 말을 듣게 됐다.

동감과 공감에는 명확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


그 두 단어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나는 솔직히 처음에는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싶었다.

영상을 통해 배운 것을 간단하게 풀어보자면 동감은 상대방과 아예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고, 공감은 상대방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그치는 것이라고 했다.


예능에 출연했던 범죄 심리학자가 들었던 예를 사용하자면, 어린아이가 불안해하는 것을 보며 엄마가 그 아이와 동감하며 아이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낀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아이는 자신이 기댈 존재인 엄마의 불안한 모습에 더 큰 불안감을 느낄 것이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둘 모두에게 별로 건강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엄마로서 아이의 불안감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공감하며, 아이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아이를 안아주는 것이 아이에게 더 안정감을 줄 것이다.


나는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믿고서 여태 살아왔다.

하지만 영상을 보고 동감과 공감의 차이점을 듣고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보니, 나는 공감능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동감을 잘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상대방과 나를 동일시하여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은 굉장히 멋진 일이기도 하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나는 그들보다 더 분노했고 때로는 내가 나서서 정의의 사도처럼 상대방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는 했다. 나는 내 소중한 사람들을 잘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아픔을 겪고 난 후 감정적으로 취약해져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내 지인에게 나는 그들을 안정시켜 주기는 커녕, 그의 감정을 더 자극하고 있을 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내가 더 나서서 노발대발하는 것은 그들을 위한다는 정의감 때문이지만, 더 깊이 파고들면 어쩌면 나는 그 사람을 핑계 삼아 내가 억울함을 겪으면서 억눌러 왔던 감정을 마구마구 분출시키는 통로로 이용한 게 아닌가 싶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내가 그렇게 그들을 대신해서 더 노발대발했을 때 우리의 관계에 좋은 영향을 미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내가 대신 화를 내주는 모습을 보며 그들은 대부분 처음에는 너무 고마워하며, '너밖에 없어'라고 표현했지만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하면 내가 부담스러운지 거리를 두고는 했었다. 


그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내 생각에는 내 과도한 동감이 그들의 감정을 이겨내고 두발로 딛고 서게 만들어 주기보다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부정적인 감정만 곱씹도록 만든 게 아닌가 싶었다. 내 딴에는 그의 감정에 공감을 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더 빨리 잊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결국 그들에게 도움이 되기보다는 어쩌면 가스 라이팅이나 다름없는, 파괴적인 행동을 한 게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의 감정에 과몰입해서 그들과 나를 동일시해서 그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기보다는,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면서도 한 발짝 물러서서 그들과 분리된 입장에서 그들을 안정시켜주는 것이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라, 그게 바로 건강한 공감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하는 것이 가까운 사람에게 무책임한 게 아니라, 그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도 때로는 관계에 필요한 덕목인 것 같다.


동감이 아니라 공감. 

무조건 나와 상대방의 감정을 동일시하는 게 아니라, 때로는 타인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차분히 위로해 줄줄 아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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