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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끗 Jan 19. 2020

관계에는 적당한 둔함이 필요하다


나는 예민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유독 사람에 대해 예민한 성격이었다.


예전에는 어떤 사람의 무의미한 표정 변화에도 신경을 쓰고, 내 말에 조금이라도 가시가 있으면 상대방이 혹여나 상처 받지 않았을까 전전긍긍했었다.

또는 누군가 잠시 피곤해서 무표정을 지었을 뿐인데도, 순간적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다했었다.

'내가 뭐 실수했나?'부터 시작해, '저 사람은 왜 나를 싫어하지?'까지 이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생각의 흐름이라는 게 굉장히 빠른 급류 같아서, 행동으로는 전혀 다른 것을 하는데도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생각이 돌아간다.

생각이 생각을 불러오고, 수많은 생각이 줄줄이 이어지다 보면 결국 내 머릿속에는 망상에 가까운 생각들이 가득 들어찬다.


그 생각의 흐름이라는 것을 통제하는 걸 멈추고 그냥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내 속에서 날뛰도록 놓아주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실이 아닌 내 주관적인 해석이 담긴 생각이 나를 가득 메운다. 결국 사실 확인이 전혀 되지 않은 '내가 사실이라 믿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채우고, 나는 그것에 깊게 잠긴다.


이 습관이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그만큼 나는 스스로 내리막길로 치닫고는 했었다.

누군가가 그저 피곤해서 어떤 표정을 지었거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인데 나는 나를 싫어한다라고 멋대로 결론을 지어버리고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 사실 나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화살을 만들어 내가 내 가슴에 꽂아버린 격이다.


그렇게 상처 받으면 마음을 닫아버린다. 그 변화는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 않기에 그에게 더 이상 친밀하게 행동하지 않거나, 아니면 무심하게 행동한다.

그렇게 되면 상대방은 전혀 영문도 모른 채 내 무례한 행동이나 과도하게 선을 긋는 행동에 기분이 상하고 그렇게 관계가 망가진다.

나는 그렇게 나 스스로를 외톨이로 만들어 가면서도 내 안에 깊게 뿌리내린 나쁜 습관을 자각하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스스로 자각하기 전까지 나는 나를 떠나가는 사람들을 탓하기 바빴다. 나를 먼저 싫어하고, 나에게 먼저 적대적이게 대했으면서 왜 지가 난리야?라고 삐뚠 생각을 하며.


이 문제를 자각하고 나서는 의식적으로 생각의 흐름을 끊으려 노력했다.


빠르게 흘러가는 생각을 억지로라도 멈추거나, ‘저 사람은 그냥 오늘 기분이 안 좋았던 것 같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증거를 대며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거야’라고 외쳐댈 때, ‘나 혼자서 단정 짓고 오해하기보다는 그냥 바보가 되자’라는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솔직하게 대화를 청했다. ‘나의 어떤 행동이 너를 기분 나쁘게 한 적이 있니?’라던가, ‘내가 이러이러해서 너를 기분 나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해’라고 먼저 다가갔다.


그렇게 말했을 때 내가 관계에서 을이 되거나, 우습거나 과민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의외로 놀라웠다.

열에 아홉은 놀란 얼굴로 ‘나는 전혀 기분 나쁜 적이 없었어’라며 내가 오해했을 당시에 본인의 사정을 알려줄 뿐이었다.

나는 그때 그들의 답에 대해 내 멋대로 해석을 더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열에 하나는 나를 조금 이상하게 보거나, 사실 그랬다며 답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나 스스로가 생각하는 만큼 나를 나쁘게 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관계가 조금 더 돈독해지고는 했다.


그때 아차 싶었다. 여태 나를 나쁘게 보이도록 만들고, 관계를 끊어내 버린 것에 대한 잘못이 내게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나 스스로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가면서 나를 떠나가는 남들에게 손가락질하기 바빴다.


내 생각이 거침없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눈에 보이는 사실이 아닌 내 생각을 믿기에 이르렀고 그것은 충분히 예쁠 수 있는 관계를 형편없이 망가뜨렸다. 내가 스스로 관계를 끊어내고 있었으면서, 나는 사람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며 외로워하고 남 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단 1퍼센트의 사실에 내 비틀린 해석이 채워지면서 관계가 어그러지고 깨졌다.


나는 의식적으로 상대방의 행동에 내 비틀린 해석을 더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상대방의 말을 믿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나에 관한 어떤 것에 대해 멈춰달라고 부탁을 한 게 아니면 적당히 그것에 관한 생각을 멈추고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내 생각이 어떤 관계에 대해 꼬리에 꼬리를 물기를 시작하면, 곧바로 생각을 멈추고 상대방에게 확인했다.


또, 상대방이 직접 내게 알리지 않는 이상, 상대방의 생각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아무리 상대방의 생각을 읽어내려 애써봤자, 소용이 없을뿐더러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 비틀린 해석이 더해져 그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기 때문이었다. 내 속도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속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모든 이들을 내 관리 아래에 두고 내가 통제하고 그들을 멋대로 휘두르고 싶다는 교만함이 그 뿌리에 있지는 않았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

몇 명은 나를 이유 없이 좋아해 줄 것이고, 몇 명은 나를 그저 그런 사람이라 볼 것이며, 나머지 몇 명은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한다.

어쩌면 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완벽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전혀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며 살아왔던 것 같다.


관계에 있어서는 적당히 둔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것이 내 천성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 스스로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습관이라면 과감히 끊어버리기로 했다.


만약 예민한 성격 때문에 과거의 나와 같은 고민을 하며 수도 없이 상처를 받는 이가 있다면, 이 글을 통해 같이 고민하고 이겨낼 수 있으면 좋겠다.

예민한 성격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적당한 둔함을 더하기 위해 애쓰면 내 마음은 편해진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완벽한 인간이 되려는 완벽주의는 버리자.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사는 이 세상에 모두에게 사랑받는 완벽한 인간이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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