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테-크 펜의 기억과 펜에 대한 집착
펜.
연필과 샤프와는 다른 한번 쓰여지면 지워지지 않는 문방사우중 하나.
(문방사우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학용품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맞는듯 하지만)
나의 펜에 대한 기억은 중학교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무래도 키보드와 핸드폰 터치 패드를 많이 쓰는 지금보다 펜과 연필을 쓰는 빈도가 훨씬 높았던 그때,
나는 펜에 대한 이상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 반 친구들도 모두 사용하고 있었던 하이테-크 0.28mm 펜. 물론 나도 사용하고 있었다.
손에 착 붙는 그립감. 그리고 종이에 선 하나를 긋는 순간 너무나도 매끄러워서 어떤 글도, 어떤 낙서도 내가 원하는 대로 써질 것 같은 그 느낌, 아마 다른 사람은 모르는 나와 펜 사이의 그 오묘한 교감. 그 느낌 때문에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 펜을 사서 쓰고 있었다. 어느날 아침에 학교 교실에 내 자리에 앉아, 필통을 열어보았을 때, 어제 저녁까지도 가지고 있던 그 펜을 잃어버린 걸 안 순간 나는 완벽한 공황상태에 빠졌다. 수업을 듣고 있었지만, 필기를 할 수가 없었고 (물론 필통에는 같은 색깔의 다른 펜도 많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없어진 그 하이테-크 생각뿐. 주변 친구들까지 의심하며 친구들의 필동을 다 찾아보기까지 한 뒤, 나는 펜을 잃어버린걸 인정했다. 엉겁의 4교시가 끝난 뒤 나는 점심시간을 틈타 학교 앞 5분 거리의 문방구로 달려가 펜을 다섯 자루나 사고, 어떤 순간에도 펜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해놓았다. 거기다 하이테-크 펜은 바닥에 떨어뜨리는 순간 심이 들어가버리는 아주 고약한 펜이었고, 그럴때 마다 나는 공황이 오지 않기 위해 예비용 펜을 꺼내 썼다.
아마도 같은 색 그리고 같은 종류의 펜을 2개 이상 사는 건 아마도 그때부터 가진 나의 이상한 집착(?)이다.
그 집착은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거의 없어졌지만, 지금도 카페나 편집숍에 문구 코너가 있으면 홀린 듯 펜을 찾는다.그리고 펜을 집어 종이에 스윽 써본다. 그러다 그 펜과 나 사이의 오묘한 느낌이 드는 순간, 망설임 없이 펜을 산다. 그것도 하나면 아까우니 두개 정도는.
무엇이 이렇게 나를 펜에 홀리게 만드는가. 아마도 펜은 비싸진 않는 돈으로 가질 수 있는 나만의 도구라서가 아닐까. 그것도 지워지지 않고, 계속 흔적을 남길수 있는 도구. 화이트로 덮어 씌워도 그 흔적은 지울 수 없는 도구. 그렇게 나의 기록을 남길 수 있는 가볍지만 무거운 도구라서, 오늘도 나는 새로운 펜을 보면 발길이 멈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