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그대로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 기간'이 있었다.
대입 수능을 보곤 난 직후 맞이한 고교시절 마지막 방학이었다. 특별히 한 분야에 흥미가 거대한 것도 아니고, 무엇이 되고 싶다는 뚜렷한 꿈도 없고, 심지어 무엇을 하고 싶다는 열망도 없는, 모범 장기수 같은 삶을 살아왔다. 사회가, 학교가, 부모가 시키는 바를 충실히 이행하고 칭찬받을 만큼의 성취를 거둬왔으나 내면은 텅텅 비어있는, 스스로가 무엇인지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잘 길들여진 개와 같은 상태로 학창 시절을 끝내고 나니 아무런 목표가 주어져있지 않는 기간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시간을 축냈다. 방 밖으로 나오는 일은 거의 없고 대개는 책을 읽거나 애니메이션을 보거나 하며 2개월 여의 겨울을 보내고 나니 다행히 대학 입학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져 잉여의 시간을 탈출할 수 있었다.
19세, 그 이후에는 단 한 번도 이런 기간이 없었다. 늘 눈앞의 무언가를 충실히 해왔고,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지적, 심리적 욕구를 채우며 공부하고 또 공부해왔다. 다만 여전히 무엇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없었고 종종 생겼던 '장래희망'은 '현실성 없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가족에 의해 치부되며 자연스레 욕구를 삭제하며 그 외의 것들을 수행해왔다. 정해진 라인 안에서의 진동은 있어왔다. 크게 벗어나지 않는 위험하지 않은 범주에서의 이동은 적절한 일탈 감과 적절한 안도감을 주어 평범한 인생을 이어지게 만들어줬다.
35세, 아니 36세. 자꾸 35에서 뇌가 숫자를 멈추고 있음을 느낀다. 계절로 치면 한여름, 머리 바로 위에 가장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적도의 오후 2시를 연상되게 하는 나이이다. 지친데 계속해서 걸어야 함을 느끼는 나이랄까? 주변에선 가장 많이 일해야 할 시기라고, 무언가를 이뤄내야 할 시기라고 재촉한다. 무언가를 이뤄내며 살아왔다 생각했는데 다시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 아니 애초에 그런 게 무슨 소용 인지도 모르겠고.
요즘 카페나 베이커리, 책방, 미용실 등을 다니다 보면 대개 내 나이 또래가 가게의 주인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어느 정도에 만족하는지를 아는 것 같은 모습이랄까? 물론 그들의 속내를 들어본 적은 없으니 그냥 '내가 그렇게 되고 싶은가 보다' 하고 생각해본다. '나의 일', '내 일', '내가 쌓아 올리는 나의 것', 그것이 무엇이든 나를 나타내는 어떤 것을 작지만 차곡차곡 쌓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여전히 나는 거리를 헤매는 사람이라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지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좀 쉬어볼까 하다가도 딱히 정확히 그런 상태인지도 잘 모르겠어서 시간을 버텨보자 하는 생각으로 보내는 하루하루.
아마 은퇴 후 노년의 사람들이 이러한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약 30년 평생 한 회사에 근무하며 매일 아침 9시 출근, 18시 퇴근을 반복적으로 하는 삶, 하나의 일만 계속해온 사람들에게 남은 욕구가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식욕, 수면욕, 재물욕, 음.... 말고는 없을 것 같다. 사람이 취미를 가져야 한다는 말을 아버지에게 계속 들어왔는데 그것은 단지 취미의 개념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링거액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하신 것 같다. 음... 필요 없다 생각했는데 필요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결국 아버지가 옳았던 것이다. 난 뭘 취미로 삼아 살아갈 수 있을까? 현재 유일하게 남아있는 욕구라고 하자면 제주에서 삶을 사는 것 외에는 딱히 없다. 뭘 해도 허무할 것 같고 뭘 해도 금세 흥미를 잃을 것 같다. 그래도 숨은 이어나가야 하니 돈을 벌어야겠지. 그러려면 좀 재밌으면 좋겠는데 그게 또 딱히 재밌는 일이 안보이니 참... 외통수이구나!
또래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보면 다들 뭔가 하고 있다. 결혼한 지 이미 오래고 애도 낳고 부모가 되고 집 투자도 하고 비트코인도 사고 캠핑도 다니고 뭐가 됐든 다들 뭔가 하고 있다. 재밌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나처럼 그냥 숨 쉬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인지도. 곧 2주에 걸친 휴일이 다가오니 모든 것에서 손을 놓고 차분히, 무언가 꿈틀대기를 기다려 봐야겠다. 하루키의 성실한 글쓰기 방식에 반하는 일이지만 어쩌겠는가. 정말 손 끝에서 한 줄도 나오지 않으니 별 수 없다. 찌가 움직이지 않을 때는 미끼를 바꿔보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싫다면 물이 들어오고 나감을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그저 스스로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무언가를 꼭 발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