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라도 오는 날이면 으레

by Hache

비라도 오는 날이면 으레 새벽시간은 더 조용해진다. 비안개로 어슴푸레한 대기와 물에 젖은 아스팔트 위로 비치는 불빛, 간간히 지나가는 자동차의 타이어가 물을 헤치며 나아가는 소리 등등. 조금 뒤 있을 출근을 생각하면 어서 잠자리에 들어야 하지만 왠지 그냥 조금 차가운 공기를 피부로 느끼고 싶어 잠을 미루고 창가에 앉는다. 나는 일하기 위해 태어난 기계가 아니니깐 최소한 잠자는 시간 정도는 자유롭게 하고 싶다는 영양가 없는 생각과 행동임을 잘 안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없다. 삶의 속성이 원래 그러한 것임을, 대부분 지루하고 쓸모없고 무가치하게 흘러가는 것이 범인의 인생이란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는 나이가 된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조그만 것의 행복을, 이를테면 새벽잠을 미루고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소소한 자유가 있는 기쁨 같은 것을 알게 된 나이가 됐다고 하면 위안이 되려나?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웃기다. 이미 망했지만 그렇지 않은 척 자위하는 완전한 정신승리 같아 보인다. 대충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밋밋하고 말라버린 볏짚단 같은 삶을 뭔가가 있는 것인 양, 자신은 그래도 남보다 나은 것이 아니냐며 아침마다 아이 등교시키고 카페에 모여 삼삼오오 목청 높이는 학부모 모임에서나 나올법한 얘기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점점 부력이 약해져 그대로 심해 깊숙이 잠수해버릴 것만 같은 그런 날들이 이어진다. 간사한 몸은 금세 또 졸리니 이제 잠을 청하러 가야겠다. 노예는 다섯 시간 후에 매일 그렇듯 또 양말을 신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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