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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옹씨 Feb 17. 2023

인간실격

입춘이 지났다. 아직 새벽은 영하의 날씨이지만 이번 겨울이 워낙에 추웠던 탓에  정도는 따뜻하게 느껴진다. 잠시 창문을 열었다 닫았더니 금세 안쪽 창에 서리가 낀다. 봄이 다가오고 있나 보다.


출근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체력보다 정신력이 절대적으로 많이 깎이고 있음을 느낀다. 역시나 미국식 자본주의화  사회구조에 적응하긴 힘든 태생을 가졌나 보다. 도망칠 곳도, 물러설 곳도 없는, 그야말로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어야만 살아 숨 쉴  있는 삶의 모순을 간직한 2023년. 인간이길 포기해야 인간으로서 살아갈  있는 지옥 한복판에 모두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발버둥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이젠 다들 인정한 분위기, 2-3 정도 퇴사 바람이 불더니 코로나와 경기불황으로 이제 조용한 퇴사라는 합의점을 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봐야 노예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적어도 정신 승리는 하는 듯.


드라마 인간실격을 두 번째 보고 있다. 오디오만 따로 제작되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상 없이 ost 대사만으로도 충분히 감성이 전달된다. 대학 2학년 때인가, 군제대  고시원에 지낼    이루는 밤마다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를 다운받아 놓고 영상 없이 소리만으로 감상했었다. 서른 번도 아마  넘었을 것이다. 그때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음성파일만 뽑아내어 듣고 다니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다. 인간실격과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는  극단에 있는 내용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전자는 세월이 흘러 지치고 힘든 현실의 고단함을, 하지만 메마른 땅에 아주 조그맣게 피어나는 힘없어 보이는 새싹 같은 인간 사이에 흐르는 조그마한 감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그리고 있다. 대조적으로 후자는 힘차고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는 새싹이다. 오로지 세계의 중심은 나, 서툴지만 서툴러서 아름다운 시작을 그리고 있다. 어쩐지 20대에 좋아했던 작품과 마흔 가까이 되어 좋아하게 된 작품이 보여주는 세상이  마음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래도 많이 지친 요즘이다.


가끔 생각한다, 뭐라도   같다고.   힘내도   같다고.  가끔 생각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 고요히 혼자 머물고 싶다고.  필요 없으니 그냥 고요하기만 하면 좋겠다고. 여전히 어둠이  익숙하고 편안하다. 어디에 있던지 고립무원을 만들어버리는 습성은 변하지 않는다. 무언가 아주 많이 지친다. 될 대로 되라지 놓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던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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