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쓰임

나의 잠들어 있던 휴가, 나의 휴식

by Hache

오랜만에 치포리를 찾았다. 치포리는 문래동에 있는 대안문화예술공간이며 카페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여름, 겨울에 냉난방이 충분치 않아 공간을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욕구가 일 때마다 난 이곳을 떠올리고 찾게 된다. 욕구의 이름은 사색, 풀어 얘기하자면 좋은 느낌을 주는 공간에서 긴 시간을 들여 차분히 한 가지 일에 대해 생각하고 그 생각을 발전시키는 일련의 활동이다.

이러한 욕구를 해소하기에 치포리는 서울 시내에서도 아주 희귀하게 존재하는 공간이다. 일관성 없는 테이블과 의자, 두 벽면을 거대하게 메우고 있는 각종 서적, 소소한 규모이지만 한편에 마련된 갤러리 공간, 그리고 커피를 만드는 공간까지, 이 모든 요소들이 '적당히' 흐트러진 듯 정돈된듯한 애매한 상태가 주는 자유분방한 느낌과 '적당한' 데시벨을 유지해주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어우러져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내가 바라는 사색을 위한 최적의 환경을 제공해 준다.

한 여름의 치포리, 그리고 매력적인 필카.

하지만 오늘, 이곳의 공기는 느리고 무겁다. 평소 좋아하던 구석자리가 답답하게 느껴져 개방된 자리로 옮겼다. 한결 나은 느낌이다. 한참 글을 쓰다 보니 어깨가 굳은 느낌이 들어 쉴 겸 갤러리로 향해본다. 2017 치포리 갤러리 공모전, 양수임 작가의 '퇴근' 전시 중이다. 일러스트풍의 그림들이 친숙하여 웹툰 보듯이 그림의 부분 부분을 여러 컷으로 나누어 관찰하니 그림 한 장 안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음이 보였다. 모든 그림을 다 보고 나니 자연스레, 하나의 그림 앞에 다시 서게 됐다.


그림의 제목은 '휴식', 서울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무실용 높은 빌딩의 숲이 보이고 드론으로 촬영한 듯 옥상들이 한데 모아진다. 그림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은 빌딩이지만 난 그 속에 '월리를 찾아라'의 월리 같이 조그맣게 그려진 옥상 속 사람들을 보았다. 옥상에 있는 이들은 모두 혼자였다. 바로 옆 건물인 듯 보이지만 서로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철저히 한 개인을 위한 고립된 공간이 된 빌딩 옥상은 이들이 휴식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보였다. 어쩐지 씁쓸했다. 직장인임이 확실한 이들의 휴식 공간이 이런 삭막하고 녹색 풀 하나 없으며 심지어 햇볕 한점 가려지지 않는 옥상 한편이라니, 물론 빌딩 내부에는 빵빵한 에어컨에 좋은 의자와 간식이 비치된 휴게실이 존재하겠지만, 추측컨데 이들은 사람과 사람 소음으로부터 잠시간의 휴식이 필요했으리라, 그러기 위한 유일한 도피처는 회사 내 휴게실이 아닌 옥상이었을 것이고. 옥상이란 공간은 몇몇 드라마와 쇼프로를 통해 청춘의 낭만으로도 그려졌지만 빌딩 옥상은 아무리 잘 봐주려 해도 전혀 낭만적이진 않다.


생각해보니 내 휴식의 욕구 또한 그림 속 직장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사람과 그들이 만들어낸 소리로부터의 완전한 분리, 직장생활 속에 늘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타인이 침범하지 않는 온전한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 이번 여름에는 안타깝게도 완전히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연수원 속 한 공간에 모인 같은 직업의 성인들, 겉도는 대화, 다양하게 섞인 소리의 불규칙한 파동이 만들어내는 웅성거림은 어지럼증을 불러일으켰다.


휴식이 필요했다. 연수원의 점심은 빠르게 먹고 나면 늘 1시간 정도가 남았다. 더운 여름이다 보니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특별히 실내에서 하는 일 없이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무슨 할 말들이 저리 많을까?' 웅성거림의 파도를 피할 곳을 찾아야 했다. 연수 첫날 도서관에 가서 식사를 해도 된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 기억나 도서관을 가보기로 했다. 직업의 특성상 도서관에 많은 사람이 몰려있을 것으로 추측되어 휴식공간으로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텅텅 빈 도서관, 다른 소리로부터의 침범 없이 홀로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의 아름다운 선율, 있는 듯 없는 듯 한 사서님,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며 '유레카!'를 외쳤을 때 느낌이 어땠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내가 받는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장소라면 온전한 휴식이 가능해 보였다.


이후 내가 원했던 사람들로부터의 분리, 즉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도서관을 매일같이 들렀고 자연스레 그곳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점심시간에 도서관에서만 읽던 것이 점차 강의 쉬는 시간으로, 강의 시간으로 옮겨왔다. 책의 내용이 내 혼을 빼놓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강의 시간에도 책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점차 나는 책을 읽는 동안 강의실의, 사람들의 소음으로부터 차단됨을 느꼈다. 집중하여 독서하는 동안 소음을 차단하는 '독서장(場)'이 내 주변에 형성된 듯 자연스레 강의실에서 소음에 의한 자극과 스트레스가 줄어들었고 이내 사람들이 모여있음에도 정신적 휴식이 가능해졌다. 기쁜 일이었다. 도서실에서도, 강의실에서도 독서를 할 때의 나는 오롯이 홀로일 수 있었다. 독서로 군중 속 휴식을 며칠째 가지던 날, 잊혔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책을 읽으며 안정을 느끼는 모습, 사람들 속에서 보이지 않는 이질적 공간(독서장)을 홀로 만들어내고 있는 나의 학창 시절 모습이.


초등학교 때부터 나는 또래집단의 대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똑같은 아이인 주제에 '시시한 아이들의 로봇 만화 대화에 끼는 것은 창피해'라고 생각했던 나는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고 교실에서 지내는 시간을 온전히 독서로 채웠다. 초등학교 때는 열 권으로 된 이문열의 '삼국지'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중학생 때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영미문학으로부터 홍세화의 '세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와 같은 사회비평서까지 독서의 범위가 넓어졌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의 글로 여성과 약자에 대한 생각을 형성해 갔다. 끝없이 읽었고, 대화는 적었다.


생각해보면 꾸준히 이어진 독서는 원치 않는 집단에 강제로 배치되어 지속적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학창 시절의 나를 휴식하게 하고 지켜주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짧게 잡아 13년의 세월, 독서를 통해 세상으로부터의 안정과 휴식을 가졌던 내가 대학원을 가고 직장을 가진 이후로는 독서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휴식은 휴가라는 단어와 등가가 되어 일 년에 몇 번 주어지지 않는 휴가기간에 여행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삶이 이어지는 것에 지속적인 피로감을 느꼈다. 이번 여름도 마찬가지였다. 휴가를 가지 못하니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됐다며 연수의 시작부터 피로를 호소하며 마음 깊이 이 시간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원치 않은 연수에 던져져 휴가를 가지 못하게 됐지만 그 덕분에 학창 시절을 통틀어 내 몸에 베여있던 휴식으로서의 독서를 다시 찾게 됐다.


생각하는 즐거움, 혼자로서의 편안함, 소음에서의 격리, 마음을 안정되게 해주는 내 안에 잠들어있던 독서를 수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니 심히 반갑다. 오래 사귀었던 마음 맞는 친구와 긴 시간 헤어져 있다가 다시 만났을 때의 느낌과 같이, 거대한 시간의 간극이 무색하게 무척 친숙하고 포근한 느낌이다. 독서의 쓰임, 이제는 정확히 얘기할 수 있다. 나에게 가져다주는 일상의 휴가, 그리고 마음의 휴식이다.


덧,


올여름에 만난 두 친구 중 하나인 <데미안>이 들려주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장식하려 한다. 나와 같이 올여름, 어딘가에 붙잡혀 상상 바캉스만 즐기는 직장인들에게 이 이야기가 잠시나마 업무에서 정신적으로 격리되는 휴식이 되어주었으면 한다.


[출처 - <데미안>. 헤르만 헤세. 민음사]

"자네를 날게 만든 도약,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우리 위대한 인류의 재산이지. 그것은 모든 힘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지. 그러나 그러면서도 곧 두려워져! 그것은 빌어먹게 위험하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렇듯 차라리 날기를 포기하고 법 규정에 따라 인도(人道) 위를 걷는 쪽을 택하지. 그런데 자네는 아니야. 자네는 계속 날고 있어. 유능한 젊은이에게 합당한 대로 말이야. 그리고 보게, 자네는 놀라운 것을 발견하네. 자네가 점차 그 주인이 되는 것을 말이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출처 - <데미안>. 헤르만 헤세.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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