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표류

튜브로 괜찮니?

by Hache

간만의 우기가 지나간 여름이다. 봄 한철 세상을 덮고 있던 먼지들을 모두 앗아간 비 덕분에 이번 여름은 대학시절 걸었던 교토의 8월을 상기시키듯 숨 쉴 수 없이 메마르고 덥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을 녹여버리는 듯 아른거리는 지면의 아지랑이, 시각적인 효과와 더불어 매미가 만들어내는 여름 오케스트라의 청각적인 효과는 오늘의 더위를 한층 더 거대하게 인식시켜준다. 카페 안 느릿한 피아노 연주곡은 데워진 실내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낮은 밀도의 공기를 눈앞에 보이는 느릿한 안개의 흐름과 같이 상상하게 만들어 준다.


이런 계절에는 아무래도 피서를 가는 것이 인간의 생존을 위해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번 여름에 나는 이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승진연수의 중력권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시작하는 날, 연수 담당자는 이런 나를 달래려는 듯 흔한 위로를 건넸다.


"어딜 가봐도 덥고 사람만 많으니 에어컨 나오는 실내에서 여름 내내 있을 수 있는 연수가 최고죠?!"


헛소리,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표정은 무신경한 듯 담담해 보였다. 오전 10시경, 폐쇄된 강의실, 여전히 강렬한 빛 속에 대조적으로 차분해 보이는 창밖 아파트 단지의 풍경, 주변을 끊임없이 맴도는 파리처럼 신경 쓰고 싶지 않지만 계속해서 귓가를 맴도는 6일째 이어지고 있는 강의, 나는 아무래도 집중할 수 없어 펜을 들어 머리 속 생각들을 쓰기 시작하다 문득 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져 눈을 들어 펼쳐지는 광경을 응시해 본다. 모두들 나처럼 '딴짓'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다르게 대다수가 강사를 바라보고 있다. 이 광경이 신기해 한참을 바라보다 보니 문득 15년 전 여름, 비슷한 공간 속의 기억이 겹쳐진다.


초록의 전경, 말없이 한곳에 집중된 40여 개의 시선,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 적막 속에 소음을 만들어 내는 유일한 사람, 여전히 한적한 창밖, 매미소리, 내 열일곱의 여름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흰색 직육면체 안에 갇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다. 대학이라는 피상적인 목표로 묶인 우리들, 오늘의 침묵과 복종이 내일의 '성공'과 '안정'을 보장한다고, '행복'으로 안내할 것이라고 순수하게 믿었던 평범한 시선들 중 하나였던 나인데...


연수원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이 그때와 너무도 같다. 나의 모습 또한 한치도 변하지 않아 보인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지금은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여전히 의심 없어 보이는 다수의 시선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반성, 성찰을 하는 것이 이깟 연수나 승진보다 더 중요해요!"라고 말하는 것은 15년 전처럼 여전히 반항아의 비뚤어진 생각, 혹은 정신적 성장을 하지 못한 어른의 철없는 투정 정도로 비칠 것이라 여겨져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말을 습기 없는 고구마 삼키듯 꾸역꾸역 식도 밑으로 삼켜낸다. 창 밖을 다시 본다. 더위 속에도 1mm의 움직임 없이 차분한 아파트, 숨이 막힌다. 15년 전과 지금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니, 변하지 않은 사회라니, 여전히 행복도 성공도 안정도 보이지 않다니,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다.


대중 속에 침묵하는 나의 모습도 변함없다. '연애, 여행, 재테크, 진로'에 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집단으로 나뉘어 이를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기 원하는 연수생들을 향해 "이런 대화는 서로 얼굴 익혀뒀다가 쉬는 시간에 알아서들 하실 수 있죠?"라는 나이가 찬 강사의 말에 나를 포함한 모두는 침묵으로 답한다. 정복당한 80년 대생들, 세월이 흘러도 침묵한다. 여전히 침묵과 복종이 유토피아로 이끌어 줄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할까? 침묵의 쓴맛은 이미 충분히 느끼고 있지 않았나?


성인이 되면 삶을 주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만의 흐름을 만들어 자유롭게 파도를 즐기는 서퍼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멋진 서퍼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언저리에는 가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 속의 서퍼들은 외부에서 오는 거친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고 그저 기존 체제가 만들어낸 잔잔한 흐름 안에서 최소한의 안위를 보장해주는 튜브를 받아 파도가 오는 대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출렁출렁 표류하는 이들만 남았다. 지금 침묵하는, 흰 직육면체 속 한 곳만 바라보는 시선들만 남겨졌다. 파도가 두렵더라도 언젠가 보드를 가지고 나가야 하지 않을까? 보드를 타려...


"10분간 쉬는 시간 갖겠습니다."


시계를 보니 첫 번째 시간이 끝났다. 여전히 그대로인 창문 밖 아파트, 그새 햇빛이 강해졌는지 눈 앞이 뿌옇게 보이는 듯 아파트가 커져 보인다. 다시 숨이 막힌다. 밖은 덥겠지? 그래도 나가고 싶다. 자유를 누리고 싶다. 고요함 속에서 나를 돌아보고 싶다. 심호흡으로 달래 보지만 이내 다시 숨쉬기 힘들어진다. 오늘 참으면 곧 주말이 오니 괜찮은 건가? 오늘 참으면 1년 후도 참게 되지 않을까? 10년 후도 참게 되지 않을까? 평생 튜브에 몸을 맡기게 되지 않을까? 안 되겠다. 땡땡이라도 쳐야겠다. 검정치마가 그의 1집 수록곡 '강아지'에서 알려준 진실처럼 '나는 개 나이로 세 살 반'인 그런 나이이니, 뭐 오늘 하루 땡땡이쳐도 이해해 주겠지.

표류생각_검정치마.jpg 개 나이로 살면 좋겠다. 출처-네이버 뮤직 검정치마 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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