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우연히 마주치는 깨달음의 시간들
이런 종류의 질문을 누구나 한 번쯤 받아봤을 것이다.
'당신에게 OO이란?'
최근에 내가 받았던 질문은 '당신에게 미술관이란?'이었다. 현대미술관의 도슨트 교육생 면접을 갔을 때 면접관 중 한 명에게 마지막으로 받은 질문이었다. 매우 형식적이고 별로 내게 특별한 답을 듣고 싶어 하지도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만 그래도 고민하여 정성스레 '소통'이라는 답을 하였다. 대답을 하면서도 '별 시답잖은 답변이구나'라고 생각했고 면접장을 나오며 값어치 없고 별로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는 티를 내는 대답을 했다고 아주 조금 자신이 싫어지는 느낌까지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게 지난겨울의 끝자락, 2월 말쯤이었을까?
간만의 장마철을 겪는 2017년 7월의 중순, 오락가락하는 비로 10분 앞의 날씨를 예측하기조차 힘든 비의 계절에 속초에 온 나는 어제가 무슨 요일인지, 오늘은 무슨 요일인지 잊어버린 채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니, 잃어버렸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요일을 잃어버리다.'
평소의 나는 아침 7시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한다. 주중의 주어진 일을 처리하고 퇴근 후 요일별 웹툰을 보고 내일의 일을 생각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토요일이 되면 적당히 멀고 긴 외출을 하며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 노력하고 일요일은 짧은 외출 후 다시 돌아오는 월요일을 준비하며 짧은 휴일을 마무리한다. 주말, 월요일, 주말, 그리고 또 월요일의 출근이 돌아온다는 매우 정확한 시간 속에 살다 보니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주말의 몸부림마저도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린 그런 반복되는 일상을 살고 있는 요즘, 그렇기에 굳이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떠올리지 않아도 관성이 베인 몸은 자연스레 요일을 뇌에게 알려준다.
이번엔 일상을 떠나 먼 곳으로 온 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어제부터 내 몸이 요일을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누가 봐도 철저, 꼼꼼함의 대명사인 내가 요일을 떠올리지 못하다니, 이건 잊어버렸다기보다는 잃어버린 것이다(물론 가능하다면 다시 찾고 싶진 않다).
이틑날의 숙소에서 양치질을 하다 떠오른 요일에 대한 생각의 흐름이 우연히 아주 평범한 질문인 '당신에게 여행이란?'에 대한 답을 알려줬다. 나의 답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잃어버리는 것'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 같아 어딘가 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체험으로 얻게 된 답이기에 뻔한 답이 뻔하지 않게 느껴지고 무언가 아주 중요한 인생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스스로 찾아낸 기분이 든다. 여행을 하면 보통의 나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철저하게 준비돼야 해. 시간을 쪼개서 소중하게 써야 해. 즐거운 기분만 들어야 해. 의미가 있는 시간이 돼야 해. 추억을 만들어야 해.'
당위성을 만들어 여행의 시간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고 하나의 일처럼 처리하게 되는 태도에 이제까지의 여행들은 나에게 자유를 주지 못했던 것 같다.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였다. 집 근처를 가든지, 국내 다른 지역을 가든지, 해외를 나가든지, 늘 그랬다. 더불어 당위성에 짓눌린 정확한 계획들 덕분에 요일을 정확히 기억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음은 두말할 것 없다.
오늘에야 찾은 여행에 대한 답은 앞으로의 나를 어느 정도 '여행 당위성의 규칙'에서 자유롭게 해 줄 것으로 생각된다. 가급적이면 '일상 당위성의 규칙'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으면...
덧,
여행에서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되는 반갑고 소중한 것들이 있다. 2년 전의 제주여행에서 발견한 목수정 작가의 글이라던지, 앞서 얘기한 뻔한 질문에 대한 뻔한 답을 찾은 것과 같은 일들이 그렇다. 이번 여행은 내륙지방으로 오게 되어 차를 가지고 다니는 만큼 짐을 마음껏 늘려도 된다는 심적 여유가 있어 가지고 오게 된 책,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해묵은 스스로에 대한 의문의 답을 발견하게 되었다.
학창 시절 하루키의 소설들을 접했을 때 성적인 묘사가 들어간 글에 환멸 비슷한 것을 느껴(순수했던 문학소년이었던 그때의 나는 모든 글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한다는 어떤 불문율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성인이 되어 '1Q84'를 읽기 전까지 그의 글들을 등한시했었다. 자연스레 '상실의 시대'는 읽다 만 책이 되어 10년을 훌쩍 넘겨버린 채 조금 궁금하지만 크게 호기심이 일진 않아 열어보지 않다가 이번 주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책장에서 꺼내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가지고 있던 의문은 이것이다.
'왜 나는 타인과 어울리려 하지 않는가?'
일정 부분 반 사회적, 냉소적인 내면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그것을 타인에게 드러내지 않는다. 말을 걸어오면 웃으면서 대화를 잘 이어나감에도 불구하고 절대 먼저 말을 걸거나 쳐다보지 않는다. 의무적 모임이 있으면 자리에 참석은 하지만 대화에 섞이려 하지 않으며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그것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화를 시작하면 불편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다.
스스로도 종종 의문이 든다. 내가 사람을 싫어하는 것인가? 자신감이 많이 부족한 콤플렉스를 내면에 가지고 있기 때문인가? 가벼운 말을 하기 싫어해서인가? 일정 부분 모두 맞는 말이긴 하지만 이게 '정답이다!'라는 확신을 갖지 못해 주변에서 이런 나를 보고 "왜 이렇게 말이 없으세요?"라고 물어볼 때마다 나의 대답은 달라지거나 말끝을 흐린다.
"글쎄요..."
상실의 시대 93쪽을 보면 주인공의 친구는 혼자 다니는 주인공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고독을 좋아해? 혼자서 여행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떨어져 앉아 강의를 듣는 게 좋은 거야?"
주인공은 이렇게 답한다.
"고독을 좋아하는 인간이란 없는 법이야.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을 뿐이지. 그런 짓을 해봐야 실망할 뿐이거든."
이 대화를 읽는 순간 '그런 것이었구나!'하고 깨달았다. 그토록 친구관계의 순수성을 따지며 하나, 둘 지인들을 없애버리던 나의 행동, 소위 사회생활에 '바람직한' 대화를 할 줄 아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하지 않으려 했던 이유, 점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빠져나가던 나의 행동들은 결국 인간에 대한 실망이 오랜 기간 켜켜이 쌓여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던 것이다.
이제 누군가 왜 말이 없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면 망설이지 않고 정확한 답변을 해 줄 수 있게 되어 오랜 기간 지녀오던 체증이 풀리지만, 한편으론 앞으로도 내가 가장 싫어해왔고 싫어하며 앞으로도 싫어할 '어른 놈'들과 사회생활을 계속해나가야 할 것이므로 고독이 끝나지 않을 것이란 것이 예상되어 씁쓸하여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