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도망치며 살 것인가

우연히 다시 마주한 책으로부터

by Hache

2013년 여름, 대학원 생활은 한 학기가 지나자마자 마음속 불만족이 계속 올라왔으나 늘 그랬듯이 불만 속에서도 버티며 하자는 식으로 1년이 더 흘러 어느덧 4학기에 들어설 시기였다. 애초에 전공을 선택할 때 신중함이 부족했고 내가 원하는 것과 잘하는 것, 싫어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스스로의 이해가 부족했기에 어쩌면 불만족은 예견된 결과였다. 게다가 인간의 기본인 식과 주에서 굉장한 불만족을 느꼈으니 더 버텨낼 리 만무하였다.


이제 사회로 진입해야 하는 마지막 시기, 이 시기를 놓치면 한국사회에서는 루저로 낙인찍히고 무한히 긴 실업기간을 맞이해야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현재의 나는 무얼 하든지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오만 넘치는 자신감이 대조적인 스물여덟의 시간이었다. 그때 NHN을 만났다. 프로그래밍이 내 적성이며 직업과 행복을 이어 줄 이상향이라고 굳게 믿던 그때 난 주저 없이 소프트웨어 계통 회사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NHN 상시채용에 지원하였다. 이 회사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내가 상상하던 이상적인 직장인의 삶은 너무 완벽히 맞아떨어졌으며 스스로는 자부심 넘치는 시기였던지라 이곳에 지원만 하면 그대로 입사할 수 있을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서류합격 메일을 받고 8월, 한여름에 면접을 위해 홀로 고속버스를 타고 성남의 그린팩토리로 향했다. 건물은 생각했던 대로 웅장했고 내부는 크고 높고 깔끔했다. 갑자기 위축이 됐다. 컴퓨터 전공도 아닌 내가 과연?이라는 생각이 면접장에 와서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배우며 활용해가던 프로그래밍이란 세계가 너무 재밌고 나름 대학원 연구실의 필요한 코드들을 잘 만들어나가고 있었기에 이런 현재의 내 모습을 보면 당연히 합격시켜줄 것이라고 두려운 마음 한편으로 희망이 샘솓았다.


1층 로비에서 방문증을 받고 2층 면접장소로 이동했다. 대기하는 동안에도 이제 막 접해서 사용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던 자료구조 책을 계속 들여다보았다. 이런 열정 넘치고 즐거움을 가진 나를 채용하지 않으면 누굴 채용할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자신감을 충전했다. 면접은 3대 1로 이뤄졌다. 어쩐지 나는 그들이 요구하는 기본 내용들을 답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전공자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나는 들어설 때와는 반대로 큰 아쉬움을 느끼며 돌아왔다.


이후로도 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한 나의 여정은 2014년 2월까지 약 반년 간 계속됐다. 최종면접까지 수차례 진행하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프로그래머라는 직함은 그렇게 근처를 맴돌다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결국 구름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난 불만족스럽지만 안전한 도피처, 나의 전공분야로 도망쳤다. 이곳은 나의 홈그라운드, 의심의 여지없이 성공을 거뒀다.


나이의, 취직의, 사회인식의, 안정된 삶의 압박을 느끼며 도망친 현재의 내 삶, 직함은 고요하다. 그리고 불만족스럽다. 계속해서 이곳으로부터 도망갈 계획을 세우고 있으면서도 이 목을 감고 있는 사슬을 완전히 풀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채로 그렇게 조금씩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


이런 삶을 원한 게 아니었는데, 늘 생생하고 가슴 뛰는 살아있는 삶 그 자체를 원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제도가 제공하는 안정의 틀 안에서 살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아직도 나의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듯하다. 여전히 혼란스럽다. 5월, 두 번째로 다시 찾은 이곳 제주의 대평리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친 책, NHN 디자인북은 과거 희망찬 삶을 향한 밝은 기억과 현재의 적당히 흐린 날들을 대조시켜주는 기억을 내게 상기시켜주고 있다. 앞으로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아이슬란드 레지던시, 제주도의 삶, 이런 것들이 모두 어쩌면 그저 단순한 현실도피라는 사실을, 어느 것 하나 근본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진실을 까발려 드러내 준다.


이제 내 삶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할까? 도망치며 사는 삶이 지겹다. 다시 살아있음을 느끼는 숨을 쉬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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