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

by Hache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수석은 못되지만 차석은 노릴만하다고 여겼다. 몇 번은 성공했다. 두어 번은 수석도 내 차지가 됐다.


어렵지 않았다. 주변에서 이게 얼마나 어렵다는 둥, 이건 최소 몇 년은 잡아야 한다는 둥, 수백만 원짜리 코스는 밟아야만 한다는 둥, 이런 사례는 없어서 불가능하다는 둥, 온갖 소리들은 내 얘기가 아닌 것으로 한 귀로 흘려보냈다. 그냥 내가 하면 뜻한 대로 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왔으니깐.


착각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건 그냥 처음부터 내가 쉽게 정복할 수 있는 범주였던 것이고, 그것을 넘어가는 곳에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 눈치 채왔을 것이다. 그래서 그 이상은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지. 그냥 내 능력이 통하는 조그만 울타리 안으로 만족한 것이었음이리라.


더 넓은 세계로 나가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없었던 인생, 하지만 궁금했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얼마나 넓어질 수 있을까? 본질적인 존재의 호기심,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거지? 와 같은 류의 두려움도 일었지만 호기심의 그것이 더 컸기에 내디딘 걸음이다.


돌이키기엔 늘 그랬듯 돌아갈 다리 따윈 다 태우고 가버리는 성향 탓에, 한 친구는 그랬지.


“넌 정말 과거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


넘을 수 없는 벽에 자주 부딪히는 세상에 나와보니 내가 얼마나 작은 세계의 사람이었는지 실감한다. 잦은 절망을 마주치며 쓰러지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해 보지만 왠지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될 것이란 생각이 문득문득 침식해온다.


누나 집에서 가져온 에쿠니 가오리의 구작, ‘장미 비파 레몬’을 읽다 보니 문득 이전에 같이 일했던 동료가 했던 말들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그와 술 한잔이라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와 같은 나 답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저는 결혼이랑 제가 이렇게 맞지 않는 사람인 줄 몰랐어요. 애초에 그게 맞는지, 맞지 않는지 생각했어야 하는데 너무 일찍 결혼한 탓에 그런 고민을 해야 하는 줄도 몰랐죠. 저는 저만의 공간이 필요해요. 저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죠. 결혼했어도 나라는 인간으로 살고 싶은데, 자꾸 그걸 무시당해요. 결혼했으니 나와 공감해줘야 한다, 같은 류의 반복되는 대화, 짜증에 이제 지쳤어요.”


어쩌면 나와 같은 면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마 학기가 끝나고 야유회 비슷한 것을 가는 차 안에서, 개인 차를 가지고 가게 돼서 단 둘이 얘기할 기회가 되자 알게 된 사실이다. 아마 여전히 견딜만한 지옥에 살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월요일이라 정돈되지 않는 생각은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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