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아이들의 고마운 배려로 우리 부부는 정말 오랜만에 데이트를 나섰다. 서로 한껏 예쁘게 차려입고 평소 좋아하던 종로로 향했다. 한추위의 날씨였지만 우린 두 손 꼬옥 잡고 고즈넉한 종로의 거리를 함께 걸었다. 오래된 전통찻집에 들어가 따뜻한 아랫목에 마주 보고 앉아 평소 마셔보지 못한 차도 느긋하게 마셔보기도 하고 놀라운 풍경 앞에서는 잠시 멈춰 같은 곳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다. 집에 돌아올 때까지 때론 진지한 대화도 하고 시답잖은 농담에 웃기고 하며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 시간 밖에서 추위에 떨었음에도 정서적으로 따뜻해져 피곤이 오히려 해소가 된 하루였다.
1월 12일, 어제는 우리 부부가 결혼한 지 17년이 된 날이다. 2년간 연애하고 결혼을 했으니 우리가 알고 지낸지도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풋풋했던 청춘들은 이제 중년이 되어 아이 둘을 키우는 부모가 되었고 어느덧 염색이 필요한 나이가 되었다. 우리 부부는 좀 특이하다. 17년간 살면서 말다툼을 한 적이 없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서로 존칭을 쓴 영향이 가장 크지 않은가 싶다. 17년 전, 난 결혼을 앞두고 아내에게 서로 높임말을 쓰자고 제안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내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평생 존중하겠다'는 일종의 나의 다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우리 부부는 지금까지 서로 높임말을 쓰다 보니 의견이 다른 경우에 싸우지 않고 슬기롭게 대안을 찾아 나간다. 그게 우리 부부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한다. 서로 존중하는 말투가 습관이 되면서 17년간 크고 작은 위기에도 난 아내를 더 신뢰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아침식사 후에 곧바로 장모님께 전화를 드려 소중한 딸을 키워주시고 결혼을 승낙해 주심에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렸다. 매년 반복하는 감사 인사지만 감사의 크기는 신기하게도 '복리의 마법'처럼 불어난다. 그리고 미뤄뒀던 연예시절부터 모아둔 편지 보관 상자를 정리했다. 상자가 많이 낡아서 지난번에 사둔 예쁜 투명 파일에 우리가 19년간 보낸 편지와 카드를 날자 순대로 정리했다. 그리고 파일에 이름을 붙였다. 이름은 '우리의 청춘일기' 다.
늦은 오후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오랜만에 외식을 했고 식삿값은 그동안 모아둔 용돈으로 중학생 큰딸이 계산을 했다. 초등학생 아들은 꽃을 사주겠다고 우릴 데리고 무인 꽃집에 들렀는데 자기가 가진 돈으론 부족함에 너무 아쉬워하길래 책을 선물해 주면 더 행복할 거 같다고 달래주어 간신히 나올 수 있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우리 아이들에게도 너무 감사하다. 집에 오늘 길에 자그마한 케이크도 사와 조촐한 파티를 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17년은 모든 순간이 축복이고 감사한 순간이었다. 촛불을 함께 불며 난 아내에게 조용히 말했다.
"여보! 우리 서로 먼저 두고 가지 맙시다. 지금처럼 사랑합시다."
난 아내가 완전한 줄 알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지만, 살다 보니 불완전하다는 걸 깨닫고 사랑이 매일 깊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