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있어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모습으로 어떤 길을 걷고 싶은 지는 기본적인 고뇌이다. 자신을 규정하고 원하는 직업을 얻으며 그로 인해 행복으로 나아가는 삶. 이 당연하고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어떤 이들에게는 처절하게 울부짖어도 가질 수 있을까 말까 한 일이 된다.
변희수 전 육군 하사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 누구보다도 간절했을 자신의 삶을 지켜내려 고군분투한 사람. 변화의 길에 앞장섰기 때문에 더 많은 이들에게 돌팔매를 맞았을. 그놈의 차별과 혐오에서 기초된 수많은 관행들을 온몸으로 받아 낸, 고작 23살의 청춘이 살아남지 못했다.
앞서 지난달에는 제주 퀴어문화축제 공동조직위원장이 숨졌다. 삶, 혐오, 미움에 너무 지친 까닭이라고 했다. 성소수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크게는 사회 곳곳에서부터 작게는 일상 속 대화 한마디까지 차별 덩어리일 것이다. 이제는 의문이 든다. 과연 세상은 눈곱만큼이라도 진보하는가?
이분법의 세상에서는 많은 것들이 규제된다. 장벽은 거대하고 견고하기 때문에 온 몸 다해 부딪쳐도 나가떨어지는 것은 본인의 살점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계란들이 스스로 깨져가며 바위에 몸을 던진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깨짐을 당해간다. 요즘 서울 시장 후보들이 퀴어 축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해댄다. 그들의 말속 이면에는 역차별과 혐오의 시선을 구분하지 못한 무지함이 존재한다. 권력자들은 침묵 또는 무지의 말로 자신의 위치를 지켜내며 사실상 혐오를 부추긴다. 미디어는 방영하고 시청자는 흡수한다. 더 많은 비판의 목소리가 나와야 하는데 역시 너무나 소수이다.
죽어버린,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떠올리며 몇 년 전 보았던 [걸스 로스트]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꽃에서 나온 진액을 마시면 잠시 소녀에서 소년이 되는 판타지적 요소가 있는 영화인데 단순히 성 정체성만을 고민하는 성장 영화가 아니다. 여러 가지 사랑의 형태와 다양한 인간의 모습에 대해 "그래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영화임과 동시에 다양성을 가진 이들이 가지는 억압과 고뇌들을 나열한 영화다.
진액을 마시고 변한 소년의 모습이 진정한 자신이라고 말하는 킴과 남자의 모습이 되어버린 킴에게 끌리지만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 킴을 거부하는 토니. 그 둘을 놓고 보면 게이와 레즈비언 트랜스와 이성애, 규정하기 어려운 정체성과 사랑들이 이쪽저쪽을 오가며 도대체 뭐가 무엇인지 헷갈린다. 영화의 중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게 뭐든 아무렴 어떠냐는 것이다. 그래 아무렴 어떨까. 탱크를 몰고 군사적 업무를 처리하는데 남성에서 여성으로 규정하고 수술을 한들 아무렴 어떨까. 군은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걸까. 심신이 미약한 것은 그녀가 아닌 대한민국 군 아닐까?
더 이상 모든 무지개 빛을 지닌 이들이 길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혹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괜찮다. 잃어버린 그 길 그대로 걸으면 된다. 삶이 지옥 같지만 걷자. 이유는 간혹 간혹 그 지옥 길에서 미치도록 아름다운 무지개가 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