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학교 3학년이고 내 동생이 1학년이었을 때 나와 동생은 아빠를 한 번 만나기로 했다. 접근금지명령으로 아빠를 보지 않은 지 딱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나는 아빠가 궁금했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뒤에 아빠라는 사람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혹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세월의 힘을 믿고 싶었고, 연륜의 미덕을 믿고 싶었다.
나와 내 동생은 고모를 통해 공식적으로 아빠를 만났다. 아빠는 굉장히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연인을 만나러 온 것처럼 설레어했고 들떠있었으며 벅차 보였다. 아빠는 나와 내 동생을 눈에 담으려는 듯 흡인력 있게 우리를 바라보았고 그에 반면 나와 내 동생은 상당히 어색해했다. 피붙이긴 했지만 어린 시절의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긴 장본인이기도 했고, 자라는 동안의 그 어떤 희로애락도 아빠와 나누지 않았기에 부녀 사이에는 이렇다 할 대화의 소재거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나와 내 동생에게 연신 질문을 이어갔다. 나와 내 동생은 너무 많은 것을 노출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소홀하지도 않게 적당히 질문에 대답하며 첫 만남을 마쳤다.
그날 집에 오며 동생과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10년 만에 만난 아빠는 대부분 기억과 비슷했지만 딱 한 가지가 명확히 달랐다.
나에게 어릴 적 아빠는 태산같이 거대한 사람이었다. 특히나 아빠가 가족들을 해하려 할 때면 크다 못해 나의 세상을 다 뒤덮을 만큼의 위력을 지닌 장대한 사람이었는데 다시 본 아빠는 참으로 작고 초라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작은 남자였나 싶을 정도로 작았다. 물리적인 키로만 보아도 어림잡아 168 정도? 잘 쳐줘야 172센티쯤으로 되어 보였다. 물론 아빠는 그대로인 채 나와 내 동생이 훌쩍 커버린 것이 더 명백한 이유겠지만 어쩐지 배신감이 들었다. 이토록 작은 아빠를 그땐 왜 그렇게 무서워했던 것일까? 다시 만난 아빠는 태산이 아니라 그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올라갈 수 있는 뒷동산 같았다.
그 당시에 아빠는 어딘가 급해 보였다. 10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의 구멍을 하루라도 빨리 메꾸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아빠의 마음은 이해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빠가 안전한 사람인지, 곁에 두어도 될만한 사람인지, 앞으로 계속 봐도 되는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적어도 사계절은 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빠는 생각이 달랐다. 아빠는 자신의 마음과 나와 내 동생의 마음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고 자식에 대한 서운함을 엄마를 향한 비난으로 돌렸다. 나는 그게 불편했다. 엄마 험담을 하는 아빠랑 통화하는 것이 싫었고 10년이란 시간을 메꿔야 하는데 겨우 한 달 만에 성을 쌓으려 하는 아빠의 조급함이 부담스러웠다. 아빠가 진정 자식들과 잘 지내고 싶었다면 나와 내 동생의 마음을 열기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했다.
결국 나는 아빠에게 엄마 이야기를 듣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하면서 서로 좀 천천히 친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의 말은 아빠에게 도화선이 되었다.
반백살이 넘은 아빠는 그의 루틴처럼 다시금 이성을 잃고 폭주를 했다. 폭주의 대상은 다름 아닌 할머니였다. 고모로부터 아빠랑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아빠가 잔뜩 화가 나서 할머니네 집안을 다 부수고 할머니를 때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내 마음에서도 무언가 쿵하고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허망했다. 아빠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하물며 강과 산도 변한다는데 사람이 어쩜 그리 똑같을 수 있을까. 아빠가 달라졌으면 했던 건 그저 나의 바람일 뿐이었다.
나는 머지않아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는 보지 말자고 했다. 아빠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 휴대폰 너머로도 생생했다. 자신의 말에 순종하던 딸이 어느덧 성인이 되어 자신의 의견을 또렷하게 피력했으니 분명 당황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빠의 놀람은 곧 거친 욕으로 변하여 나에게로 날아왔다. 엄마를 비난하고 나를 욕하며 딸한테 한다고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말들을 나에게 퍼부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오히려 아빠의 욕이 공포가 아니라 슬픔으로 다가왔다. 서글펐다. 이렇게 나에게 욕을 해대는 이 사람이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사람이 나의 아빠라는 사람이구나라는 사실에 가슴 한편이 시렸다.
그 이후 아빠의 얼굴을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아빠는 잊어버릴만하면 엄마의 옛날 가게번호로 전화해서 엄마를 힘들게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도 엄마를 지키러 나타났다. 이제 커버린 나에게 아빠의 욕과 협박은 그 어떤 데미지도 주지 않았다. 빈수레가 더 요란하게 소리를 내듯 아빠의 거친 말은 오히려 공허한 메아리 같았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아빠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아빠가 생각하는 강자의 방식으로 거기에 한 스푼을 더 얹어서 응수했다. 아빠가 심한 말을 하면 나는 더 심한 말을 했고, 아빠가 욕을 하면 나는 더 상스럽게 욕을 했다. 아빠가 찾아와 죽이겠다고 협박하면 나도 아빠를 죽이고 감옥에 가겠으니 자신 있으면 찾아오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마지막 통화에서는 나의 말대꾸에 아빠 본인이 본인의 화를 못 이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스스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날 이후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빠는 우리의 인생에서 다시 사라졌다. 몇 해 전 고모에게 전해 들은 아빠 소식이 전부였다. 고모가 아빠를 사기죄로 고소했으니 혹시 아빠가 연락하거든 자신에게 꼭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사실 아빠를 보지 않고 산 이후의 세월도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다. 애둘을 가진 싱글맘으로 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쉬운 일은 아니다. 어릴 적에는 나에게 부모님 중 한 분이 안 계시다는 이유만으로 내 친구의 엄마는 나와 친구를 놀지 못하게 했고, 엄마도 외부인과 일을 처리할 때 꼭 남편과 상의한 후 연락드리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이 나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딸들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 내 과거의 연애들을 복기해봐도 분명 나는 아빠를 연상하게 하는 남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가 그 남자들과 결혼했다면 나도 어쩌면 남편에게 매맞는 부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힘든 시간들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나와 내 동생 모두 좋은 남편을 만나 자식도 낳고 잘 살고 있다. 그래 맞다. 나와 내 동생은 엄마를 닮았다. 나도 엄마처럼 밟히고 꺾여도 살아남아 피는 꽃처럼 스스로 자라나는 자생력을 가졌다. 그리고 그 힘은 지금도 나를 꽃피우게 한다.
나는 줄곧 이 모든 기억을 안고 자라왔기에 엄마의 삶을 꽤나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바람직한 효녀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느 집안의 딸들처럼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되어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고 했던가. 정말 그랬다. 나는 입덧을 하는 순간부터 줄곧 엄마 생각이 났다. 물리적으로는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었지만 남편과, 동생과, 엄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원군을 얻은 것 같았다. 배가 부르고 내가 만삭이 되어 출산을 앞두었을 때는 엄마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났다. 딸을 낳은 날, 나는 태어난 딸보다는 나를 낳았을 때 홀로 핓덩이를 안고 있었을 엄마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를 상상했다. 그리고 내가 엄마라고 불리는 것이 점점 익숙해져 갈수록 나의 엄마에 대한 고찰 역시 깊어져갔다. 혼자 나를 낳고, 혼자 동생을 낳고, 혼자 두 애들을 키워내고, 혼자 일을 하고, 혼자 살림을 하고, 그 누구도 없이 혼자서 이 모든 것을 겪어 이 자리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이제 머리가 아니라 온 마음과 온 몸으로 엄마의 삶이 받아들여졌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직도 엄마가 이 모든 일들을 겪고도 저렇게 영롱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마치 깊은 땅속에 묻혀있어도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훼손시킬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다이아몬드처럼 변치 않은 단단함이 우리엄마에게 있다. 그리고 그런 엄마가 내 엄마라서 정말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내 인생 어딘가가 막혀 힘들 때마다 엄마를 생각한다. 엄마의 삶을 돌아보다 보면 아무리 힘든 일도 다시 헤쳐나갈 수 있다는 마음이 생긴다. 자신을 짓밟으려 하는 사람이 있어도, 나를 괴롭히는 거칠고 잔혹한 세상의 폭격이 있어도 결국 살고자 마음을 먹어 스스로 빛을 내는 사람을 덮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엄마는 살면서 늘 말해왔다.
"엄마는 이렇게 사는 사람이 아니야. 엄마 알지? 엄마는 잘 살 거야" "그래도 아빠가 있었으니 너희가 있었잖아. 엄마는 그걸로 됐어"
"엄마는 너희가 있어서 살 수 있었어"
"엄마가 돈을 벌어야 해서 늘 곁에 있지는 못하지만 너희를 많이 사랑해."
엄마를 살게 한 말이기도 했지만 나를 살게 한 말이기도 했다.
우리 엄마도 어느덧 예순을 바라보고 있다. 염색을 하지 않으면 하얀 머리가 눈처럼 소복이 쌓이고, 돋보기를 써야 글씨가 또렷이 보이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의 엄마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장모님이자 손자와 손녀를 거느리는 할머니라는 칭호도 함께 가지며 또다시 새로운 엄마가 되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줄곧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꿈을 이룬 것 같다. 엄마도 엄마의 꿈을 이뤘을까. 이 글이 엄마의 남은 인생을 부디 더 평안하고 더 행복하게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