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가지 마오'에서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사람들은 술값 이외에도 엄마에게 따로 꽤 묵직한 팁을 전했다. 아빠가 미리 가불 해간 15일 치의 급여는 받지 못했지만 엄마는 그곳에서 상당한 팁을 건졌다. 엄마는 팁으로 받은 200만 원에 할머니가 주신 돈을 보태서 삼촌네 집 근처 지하방을 얻었다. 아빠는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아 엄마랑 어린 나 이렇게 둘만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엄마는 집안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일하며 나를 키웠다.
이 집에서는 엄마가 간이 식탁을 펴서 밥을 먹곤 했는데 어느 날 미처 다 펴지지 못한 식탁이 접히면서 그 위에 있던 뜨거운 뚝배기가 내 팔 위로 쏟아졌다. 엄마는 나를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화상의 흔적이 지금도 내 왼쪽 팔에 남아있다.
나야 기억이 나지 않아 내 몸에 언제나 있는 조금 크고 울퉁불퉁한 점같이 여겨지는 화상 자국이지만 엄마는 이따금 내 팔의 화상 자국이 가난의 심벌 같다며 속상해하신다. 돌봐줄 사람이 있었더라면, 간이 식탁을 펴서 밥을 먹지 않았더라면, 제대로 된 연고나 비상약이라도 갖추고 있었더라면 이라고 아쉬워하는 엄마에게 나는 늘 괜찮다고 말한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살아서인지 같이 오랜 시간 지낸 사람들도 한참이 지나서야 화상의 존재를 눈치채곤 한다.
그러고 보면 모든 일이 그랬던 것 같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해야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나의 일들은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지 내 삶에서는 별일 아닌 것처럼 그냥 스쳐 지나갔다. 그 덕에 나에게는 씁쓸했던 가난도, 우여곡절 많은 가정사도, 엄마의 힘겨웠던 이혼도 잠시 머물다가는 현상이었을 뿐 흠은 아니었다.
아빠는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 이제 자신이 정말 일본으로 가야겠다면서 엄마에게 이혼 요구를 해왔다. 일본에서 일을 하려는 데 유부남 신분으로는 불리하다는 이유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어떻게 해야 이혼을 할 수 있을까 궁리하던 엄마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아빠는 엄마를 끌고 법원에 가서 이혼을 신청했고 서류상의 이혼은 확정되었다.
이렇게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어느 날이었다. 엄마는 몸이 안 좋아 찾아간 병원에서 임신 5개월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청천벽력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얼마나 삶이 팍팍하게 흘러왔으면 월경이 끊어졌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까. 할머니와 삼촌들은 둘째를 낳지 말라고 했다. 큰 이모와 엄마의 동생들도 아기를 낳지 말라고 했다. 할머니는 돈을 주며 병원에 가라고 했고 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뱃속의 아기를 위해서도 더 나은 방법이라 생각했다. 엄마는 마음을 정리한 뒤 병원으로 향했다
그 사이 아빠는 삼촌네 집에서 엄마를 찾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으로 왔는 데 있어야 할 엄마는 보이지 않고 가족들은 엄마가 어디 갔는지 말하지 않았다. 굳게 다문 가족들의 입을 열기 위해 아빠는 폭주라는 방법을 택했다. 타오르는 불처럼 화르락거리는 아빠는 일순간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가족들이 아빠를 말려봤지만 아빠보다 더 젊었던 막내 삼촌조차 역부족이었다. 아빠가 막내 삼촌의 코까지 부러뜨리자 가족들은 엄마의 행방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한달음에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엄마의 손을 낚아 채 집으로 데리고 왔다. 엄마는 아이를 낳을 테니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 말했다. 아빠는 그 요구조건을 받아들였고 엄마는 4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사 간 곳은 오산의 깊숙한 시골이었다. 엄마는 그 시골에서도 가격이 가장 저렴했던 회색빛을 띄는 2층짜리 조립식 건물로 들어갔다. 엄마가 살던 동네는 아니었지만 같은 오산이라는 것만으로도 엄마는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다음 해 1월, 겨울의 중턱에서 내 동생이 태어났다. 한겨울에 태어난 내 동생은 그래도 보건소가 아닌 병원에서 세상의 빛을 봤다. 엄마는 다음날 바로 퇴원하긴 했지만 조금은 안전한 곳에서 아이를 낳았고 병원에서 낳은 덕분에 동생의 갓 태어났을 때의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엄마는 집으로 돌아와 홀로 미역국을 끓여먹었다. 산후조리를 해주겠다던 큰 이모는 갑작스레 연락이 닿질 않았다. 다음날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의 다음날도 큰 이모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를 낳았을 때도 몸조리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름이었고 아파트 거실 너머에서 미역국을 끓여준 주인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추운 날씨가 몸을 굳게 한 것뿐 아니라 마음까지 다 얼어붙게 한 것 같았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 유독 치명적인 겨울은 단단했던 엄마도 주저앉히기에 충분했다. 엄마는 도와주는 이 한 명 없이 웃풍이 도는 방에서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4살 난 딸과 이제 갓 태어난 신생아를 키워내야 했다. 젖앓이 때문에 열이 펄펄 끓어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고 가슴이 벽돌처럼 굳어 고통스러웠다. 찬물로 천기저귀를 빨 때면 손이 찢어지는 것 같았으며 그 와중에 먹고살겠다고 차가운 손을 호호 불어가며 봉투를 붙이고 인형 눈알을 붙였다.
부업은 부업이 이라는 말뜻에 걸맞게 크게 돈이 되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손이 많이 가는 어린아이 두 명을 집에 두고 하는 부업은 더욱 속도가 나지 않았다. 아이가 두 명이 되면 두배가 힘들 것 같지만 실은 백배가 힘들다. 그만큼 아이 한 명과 두 명은 엄청난 차이였다. 엄마는 굶주렸다. 쌀이 떨어져 밥을 먹지 못했다. 대책이 필요했다. 이대로라면 첫째도 굶을 수 있고, 젖을 먹는 둘째도 굶을 수 있었다. 엄마는 고민 끝에 부잣집으로 시집간 작은 이모에게 연락을 해보았지만 차갑고 뾰족한 답변만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목구멍에서 무언가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듯했다. 어찌나 날카롭게 말하는지 이때 들었던 한 마디가 서러움과 서글픔이 되어 엄마 가슴에 평생을 두고도 뺄 수 없는 못을 박아 넣었다.
엄마는 처음으로 외할머니가 절절하게 보고 싶었다. 그동안 부모의 부재를 부정하지 않고 잘 받아들이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 잘 헤쳐나갔었는데 그때만큼은 달랐다. 엄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외할아버지가 그립고, 건강하게 살아계셨다면 분명 엄마 곁에 있어 줄 외할머니도 그리웠다. 차오르는 그리움이 넘치다 못해 자꾸만 눈물로 쏟아져 내렸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엄마는 매일매일 울고 또 울었다. 그런 외로운 엄마를 위로해준 건 다름 아닌 4살의 나였다.
"엄마!엄마!갠차나 갠차나"
4살의 딸은 엄마에게 계속 말을 붙였다. 그림을 그려도, 하늘의 구름을 봐도, 동생 입에서 터지는 옹알이를 봐도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미주알고주알 떠들며 엄마를 흔들어 놓았다. 작은 몸집으로 엄마를 안아줄 때도 있었는데 그때 딸에게서 전해지는 온기는 엄마에게 절대 작은 것이 아니었다. 엄마는 첫째 딸의 수다와 둘째 딸의 미소에서 나오는 에너지로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다. 어쩌면 엄마를 계속 살 수 있게 한 건 딸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동생이 태어나고 일주일이 지난 후에 얼굴을 비추었고 동생이 세상에 나온 지 2개월도 지나지 않아 돈 한 푼 주지 않고 일본으로 넘어가버렸다. 일본으로 넘어간 아빠는 무려 4년 동안이나 엄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빠가 떠나고 생계는 더욱 힘들어졌다. 하루하루가 고단하게 흘러가던 어느 날, 옆집에 사는 이웃이 엄마의 소식을 전해 듣고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교회에서는 쌀과 기저귀 그리고 봉투에 5만 원을 넣어 엄마에게 전달해주었다. 엄마는 그날 이후 딸들을 데리고 매주 교회에 다녔다. 교회를 다니며 알게 된 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출근할 수 있는 보험일을 소개해 주어 엄마는 보험회사에 취직도 했다.
엄마는 보험회사에서 일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아빠는 일본에서 간헐적으로 전화를 걸었고 딸들과 통화를 하기도 했다. 때로는 아빠의 여자들이 엄마에게 연락해 따지기도 했다. 얼굴도 모르는 여자들에게 항의를 들을 때마다 엄마는 이미 호적정리 다 되었으니 거기서 아빠랑 행복하게 살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아빠의 흔적이 엄마 삶의 끄트머리에 아직 남아있긴 했지만 엄마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엄마가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건 아빠에게 비밀이었다. 엄마는 내가 아빠랑 통화할 때마다 말하면 안 된다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나 7살은 비밀을 지키기에도 에둘러 거짓말을 하기에도 서툰 나이였다. 내 입에서 엄마의 보험회사 얘기를 전해 들은 아빠는 며칠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빠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한 일은 엄마의 머리채를 잡아 회색빛의 조립식 건물 2층으로 올라가는 일이었다. 엄마는 직사각형 건물의 가장 끝에 붙어있는 시멘트 계단에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죽을힘으로 버티었다. 버티던 손에 힘이 풀려 엄마의 모습이 2층으로 자취를 감추었을 때는 이미 엄마의 비명소리가 내 귓가에 쉼 없이 맴도는 중이었다.
이 광경은 나의 최초의 기억이다. 기억의 필름에 자리하는 내 인생 첫 오프닝의 순간이자 태어나 처음으로 아빠라는 사람을 내 눈으로 마주하고 세포에 각인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아빠는 그날 이후 우리와 쭉 살다가 내 나이 12살에 접근금지 명령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한 번은 아빠가 내 중학교 졸업식에 말도 없이 나타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얼마나 놀랬었는 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채 한참을 울어재꼈다.
아빠는 언제나 그랬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느닷없이 등장해 온 세상을 헤집어놓고 다시 홀연히 사라졌다. 그 이후로도 이따금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어떤 때는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모습을 보이진 않았지만 자기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한 번씩 출연해 가족들의 가슴을 졸이게 했다. 나는 지금도 집 근처에 아빠와 비슷한 체구의 낯선 남자를 보면 아빠일까 봐 심장이 뛴다. 아빠로 하여금 우리 가족의 안온한 일상이 깨어져버릴까 염려가 된다.
접근금지명령 이후 딱 10년이 지났을 무렵 고모에게 연락해 아빠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그땐 나도 내 동생도 미성년을 벗어난 어엿한 대학생이자 성년이었다. 그리고 그 만남 이후로 나는 아빠를 영영 보지 않기로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