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하고 싶은 곳에서 쉬고 싶은 곳으로
그토록 살고 싶다고 바라던 스웨덴으로 유학을 떠난 2년 후, 나는 그토록 탈출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부정하고 외면하기만 했던 한국 사회에 살고 있는 지금, 나는 지금껏 한국에서 살아온 27여 년의 세월 동안 가장 덜 불안하고, 가장 안정감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변한 걸까? 한국 사회가 변한 걸까? 그 무엇도 정체돼있는 것은 없기에 나도 이 곳도 2년 동안 변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만 조금 있을 뿐.
가장 불안한 시기에 있는 만큼 완벽하게 안정된 생활을 꾸리고 있는 건 아니지만, 과거의 나를 떠올려보면 스스로도 지금의 안정되고 여유로워진 내가 가끔은 의아하다. 우리보다 느리고 여유 있고 자극이 덜한 스웨덴에서 살다온 영향일까? 전반적으로 삶을 대하는 자세와 삶을 끌어가는 속도에 여유와 변화가 생겼음을 느낀다. 이 변화들은 내 삶 곳곳의 개별적인 요소에 조금씩 스며들며 조금은 더 인간적이고, 여유롭고 관용적인 손길로 내 삶을 어루만지고 있다. 앞으로의 글에서는 스웨덴에서 산 경험이 내가 똑같은 환경을 인식하는 데 어떤 변화를 끼쳤는지 나눠보고자 한다. 스웨덴도 유토피아는 아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가치와 그 곳의 가치가 대척점에 있기에 앞으로의 글에서는 스웨덴에서 산 경험이 내가 똑같은 환경을 인식하는 데 어떤 변화를 끼쳤는지 나눠보고자 한다.
집이 내게 지니는 의미
집. 태어나서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사적인 비밀을 많이 저장해두는 곳이다. 어릴 적의 나는 내 방 곳곳에, 특히 책장에 많은 비밀을 저장해두었다. 책 사이에 용돈을 숨기기도 하고, 친구들로부터 받은 편지나 나의 조그만 일기장을 숨기기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대학에 들어와 자취를 시작하면서 집에 대한 나의 애정은 조금씩 식어갔다. 7시에 집에서 나가 11시 30분경 집에 돌아오던 고등학교 3년 내내 집은 잠시 눈만 부치던 공간이었다. 서울로 대학을 와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과 달리 강제 야간 자율 학습도 없고 많은 자율 시간이 있었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집은 마찬가지로 잠시 눈만 부치던 공간이 되었다. 학교를 마치고는 친구들과 서울 탐방을 가거나, 카페나 밥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2차까지 끝내고 나면 집에 오는 시간은 어김없이 10~ 11시였다. 호기심 많은 성격 때문에 온통 이 세상은 재밌는 것으로 가득했던 서울에서의 라이프스타일이 매력적이기도 했지만, 사실 좁은 집에서 혼자 남겨지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나를 자꾸 밖으로 이끌었다. 이웃과의 교류도 딱히 없고, 평균 5~6평에 이르던 작은 집은 때로는 감옥같이 느껴졌다. 때문에 주말에도 나는 어김없이 학교 근처 카페를 찾아 집을 나왔다.
'어디서 살 것인가'의 저자 유현준 건축가에 따르면 대도시에 살고, 소득이 낮을수록 집에서 한 개인이 머무는 정주공간이 좁아진다. 이 좁아진 공간을 보완하기 위해 도시 곳곳의 카페가 커피값을 받고 공간을 제공한다. 그런데, 수년 째 카페를 찾아 유랑하던 내 생활 패턴은 스웨덴에서 사는 2년 동안 깨지고 말았다. 2년 동안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고,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이 깃들어 있으며 애정을 갖고 꾸민 곳, 바로 내 집이다. 집은 늘 탈출하고 싶고 답답한 곳이었는데, 스웨덴에서 2년 동안 집은 내게 누군가를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쉬고 싶은 곳이 되어주었다. 한편, 가장 사적이고 개인적인 공간인 타인의 집에 가장 많이 초대를 받은 시간이기도 했다.
탈출하고 싶은 곳에서, 머무르고 싶은 곳으로
스웨덴 도착 후 집 계약을 하기 위해 학교 하우징 오피스에 들린 날, 한껏 들떴던 나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명하다. '방이 너무 크고 깨끗해! 창도 정말 크고, 안에 화장실과 샤워 공간도 따로 있어. 공용 주방도 꽤나 깨끗하고 정말 넓어'. 한껏 들뜬 모습을 본 관계자는 선하게 웃으며, '많은 아시안 학생들이 처음 방을 보고 놀라곤 해'라고 말하며 그 반응들이 나와 같다고 했다. 아무래도 인구 과밀화된 아시아의 도시에서 온 친구들 대부분이 평균 4~5평의 공간에서 대학 자취 생활을 보내다 주방을 제외한 평균 7평의 개인적인 공간을 확보한 기쁨을 표출했으리라. 더욱이 주방이 방 밖으로 빠져있으니 실제 침실로 가용할 수 있는 공간은 더욱 넓다. 기쁜 나를 앞에 두고 관계자는 스웨덴에서는 법적으로 한 개인이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 제공해야 하는 방 사이즈와 창의 크기 등이 정해져 있어 무작정 개미 소굴처럼 작게 지을 수 없다고 했다. 또한,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휠체어가 접근할 수 있도록 건축과 인테리어를 위한 세부사항들이 법 조항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자취 생활 10년 동안 가장 넓은 개인적 공간을 가진 나는 처음으로 내 방을 머무르고 싶은 공간으로 꾸미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내가 살던 곳은 학생들이 모여사는 동네에 지어진 4층짜리 아파트로, 학생 전용 아파트는 아니지만 80% 이상의 거주자가 우메오 대학 학생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원룸과 같은 구조의 방(평균 20^m)을 1개 임대하고 매달 월세(35~40만 원 정도, 우메오 기준)를 냈다. 방 안에는 큰 이중 창문과, 침대, 책상, 의자, 책꽂이, 안락의자, 미니 테이블, 개별 욕실이 갖춰져 있었다. 조명, 커튼, 이불 등 나머지 필요한 것들은 많은 학생들이 IKEA나 중고 전문 가게에서 자신의 취향대로 구매한다.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들에겐 저렴하고 단기간 실용적으로 쓸 수 있는 IKEA와 중고 상품은 굉장히 유용하다.
하루의 생활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
집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의식주)를 충족시키기 위한 공간이다. 때문에 우리 삶에 있어서 집은 굉장히 중요하다. 하지만 스웨덴에 사는 동안 나는 우리나라와 비교하여 사람들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고, 집은 생활의 근간이자 사회적 교류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인테리어에 신경을 많이 쓴다고 느꼈다. 스웨덴 브랜드인 IKEA도 작년 75주년을 맞아 늘 '집'만 생각해왔다고 하니, '집'이라는 공간이 스웨덴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집은 스웨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까?
먼저, 스웨덴의 날씨 때문이다. 스웨덴은 4계절 중 겨울이 춥고, 굉장히 길고 어두워 겨울에는 실내 활동을 많이 한다. 특히 내가 살던 북부 우메오는 11월 초 눈이 오기 시작해 5월까지 눈이 내리고, 해는 8~9시쯤 겨우 뜨기 시작해 오후 1~2시 되면 서서히 지기 시작한다. 나머지 시간 동안 도시는 캄캄한 어둠에 휩싸여 있다. 때문에 겨울에는 집에서 책을 읽거나, 티타임을 갖거나, 베이킹이나 요리 등 실내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서울에서는 일과 후 늘 밖에서 하루의 시간을 보낸 나도, 스웨덴에서는 하루의 끝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냈다.
스웨덴의 라이프스타일도 집이 중심이 된다. 스웨덴 사람들도 평균 8시간 근무를 하지만, 우리와 달리 저녁은 꼭 집에서 먹는다. 공부를 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외식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요인도 있지만, 스웨덴에 가정 중심의 문화와 일과 삶의 균형이 잘 자리 잡혀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점심은 간단하게 도시락을 싸오거나 샌드위치로 해결하고, 저녁은 가족 또는 친구와 함께 요리를 해서 먹는다. 장바구니 물가가 굉장히 저렴하고(한국보다 저렴), 가족들과 요리를 하고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유학기간 2년 동안 나 역시도, 집에서 혼자 요리를 해 먹거나, 친구들과 함께 요리를 해 2~3시간의 여유로운 저녁을 먹는 것이 늘 일상이었다.
특히 한국에서의 자취 생활과 가장 다른 점은 한 층에 같이 사는 친구들과 공용으로 쓰는 주방과 식사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요즘 우리나라에도 셰어하우스 형태로 많이 생기고 있다). 이런 형태의 아파트를 코리도(Koridoor)라 부르는데, 적게는 6명 많게는 12명의 학생들이 주방(냉장고, 찬장, 인덕션, 오븐, 전자레인지, 식사 테이블)을 공유한다. 계획하지 않아도 주방에서 우연히 만난 코리도 친구와 저녁을 먹기도 하고, 다른 친구를 내 방으로 초대해 요리를 함께 해 먹기도 했다. 서울에서의 자취 생활 8년 내내, 나는 집에서 요리를 한 적이 거의 없던 내겐 큰 변화였다.
일을 하지 않고 학교를 가지 않는 주말은 어떨까? 주말에는 평일과 달리 쇼핑몰이나 시내에 사람이 붐빈다. 하지만 쇼핑하는 시간도 잠시 주말은 오히려 평일보다 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주말을 맞이해 카페에서 브런치나 스웨덴식 티타임 FIKA(피카)를 하는 사람도 많지만, 요리를 해 먹는 게 일상인 스웨덴에서는 집이 카페가 된다. 굳이 시내 카페에 나갈 일이 없고서는 많은 사람들이 집에서 직접 브런치를 만들어 먹거나, 케이크를 굽고 커피 프레스로 커피를 내려 먹는다. 특히 요리를 직접 해 먹는 것이 외식을 하는 것보다 경제적이고, 집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집에서 친구들과 티타임을 가지며 보드게임을 하거나 넷플릭스를 감상하는 시간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주말에 가장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었다.
늘 밖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고 집은 잠만 자는 공간으로 인식해온 내게, 하루의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낸 2년의 시간은 집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았다. 앞으로 내가 어디에 살든 집은 나의 가장 사적인 공간이자, 내가 유일하게 혼자 쉴 수 있는 안식처로서 적당한 크기와 쉴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렌트비가 아무리 큰 압력이 되더라도 최소한의 방어벽을 마련하고, 편의시설이나 교통을 조금은 양보하더라도 인간답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것이 이제는 내게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되었다. 그리고 집은 더 이상 탈출하고 싶은 공간이 아니라 머무르고 싶은 공간으로 가꾸게 되었다. 스웨덴에서 돌아온 후 나는 집에서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