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생 시절 수강 중이던 글쓰기 수업에서 처음으로 '내가 누구인지'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문제를 받았으니 답을 내야 하는데 쉽사리 답을 낼 수가 없었다.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은 문제였기 때문이다. 빈 공간의 무게는 없었지만, 그 빈 공간이 내게 주는 압박은 상당했다. 학교에서는 항상 답이 정해진 문제만을 받았었는데... 아이보리 색의 노란색 속지 위에 새까맣게 새겨진 문장, 그리고 그 속의 공허한 괄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20여 분을 보냈다. ' '지금까지 나를 만든 것, 지금의 나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그 무엇은 뭘까?'.
'지금까지 나를 만든 것은 8할이 사람과의 만남'이다. 고민 끝에 빈 괄호를 채웠다. '여행'과 같은 구체적인 명사로 답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답이 명사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새로운 풍경, 음식, 공간, 사람 등 여행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내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요소를 구체적으로 끄집어내고 싶었다. 길을 잃거나 내가 잘 곳이 없었을 때, 혼자 여행하는 것이 심심했을 때, 배가 고플 때, 어딜 가야 할지 모를 때 등 예측 불가능 한 여행의 핵심에는 우연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잘 곳 없던 나를 재워 주고, 요리를 해 주고, 길 잃은 나와 함께 길을 찾아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낯선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나는 조금씩 나를 발견해 나갔다.
2012년 파리에서 고아가 된 나를 구해준 나디르, 그가 헤어질 때 준 메시지
익숙한 환경에서 떠날 수 있었기에 가질 수 있었던 새로운 만남들. 이 만남은 특히 막막하던 내 삶에 새로움과 대안적인 삶의 희망을 한 줄기 비춰주었다. 당시 내겐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 있었으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고백건대 내가 자발적 여행을 시작한 계기는 사실 '도피'를 위해서였다. 2011년 아빠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늘 달리기만 하던 삶 위에 멈춰 섰다. 내일의 태양은 늘 뜰 줄 알았는데, 뜨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빠의 죽음도 너무 슬펐지만, 아빠의 부재로 인해 내가 헤쳐나가야 할 현실이 더 무서웠다.
'앞으로 우리 가족은 누가 먹여 살리지? 등록금은 어떻게 내야 할까? 내가 결혼할 때 아버지 없는 애라고,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이 반대하면 어떡하지? 친구들이 나를 불쌍하게 보진 않을까? 왜 어린 나이에 벌써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더니 참 이기적이게도 아빠가 돌아가시면서 내가 맞닥뜨린 현실적인 문제들이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동시에, '딸아, 삶은 유한하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한 번 고민해보렴' 아빠가 남겨 준 메시지에 대한 해답도 찾아야 했다. 가족도 친구도 그 누구도 내게 답을 줄 수 없었고, 책임져 줄 수 없었다. 두려운 현실과 미래 앞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기 위해 나는 다른 나라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2012년 6월 7일 목요일 아침 7시, 프랑스 파리 샤를 드골 공항.
베트남을 거쳐 드디어 꿈에 그리던 낭만의 도시 파리에 도착했다. 불어로 가득한 공항 곳곳, 영어는 거의 들리지 않는 콧대 높은 프랑스 공항에서 나는 위축되어 있었다. 짐을 찾자마자 파리에 머무는 동안 나를 재워주기로 한 프랑스 호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행자가 현지인에서 함께 생활하며, 문화 교류를 도와주는 사이트 '카우치서핑'에서 연결된 호스트였다. 함께 지낸 여행자들의 평가가 워낙 좋은 슈퍼 호스트에다가, 사전에 연락을 취했을 때 굉장히 호의적이어서 이 사람만 믿고 파리에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파리에서 파리지안과 함께 생활하며 현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매력적인가. 새로운 친구를 만난다는 기대감과 긴장감을 다스리며 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Hello? 나 너네 집에서 머무르기로 한 도희인데, 지금 공항에 도착했어. 어떻게 집으로 가면 돼?"라고 묻자
그는 "왜 벌써 파리야?"라고 되묻는다. '이건 무슨 소리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 "나는 오늘 도착한다고 말했었잖아. 일단 시내로 가려고 해"라고 말하니, 호스트는 내가 토요일 도착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지금 출근을 해야 해서 바쁘니 일 끝나고 저녁에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시계를 보니 목요일 아침 8시가 조금 넘었다. 아는 사람도, 아는 것도 없는 프랑스 파리에서 나는 졸지에 갈 곳 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어떡하지...?' 현지인 호스트와 여행할 생각에 여행 계획을 짜지도 않았고, 혹시나를 대비해 준비했던 유럽여행 책자는 경유지 베트남에서 여행을 할 때 잃어버렸다. 막막했지만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어찌 됐든 여행을 해야 하니 공항에서만 머물 수는 없었고 저녁에 호스트를 만날 거란 기대가 있었다(희망을 가져야만 했다). 그때, 여행책자에서 슬쩍 봤던 파리 시내로 가는 방법이 생각났다. 내가 아는 방법은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가는 것뿐이었고, 나는 오를리 버스를 타고 파리 시내로 향했다. 약 1시간 뒤 버스는 파리 오페라 극장 앞에 나를 내려주었고, 밖에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 없이 23kg의 큰 캐리어와 배낭을 지고 갈 곳 없는 내가 있을 수 있던 곳은, 오페라 내 유니클로 매장 앞 계단뿐이었다. 비를 피해 계단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이제 어떡하지?' 고민하며 한 달 간의 유럽여행이 시작되었다.
원래 계획은 유럽 4개국(프랑스,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배낭여행이었다. 유럽여행을 가야겠다는 계획은 없었고, 모아 놓은 돈도 많지 않았다. 그저 마음 한편에 대학생들의 배낭여행이라는 로망과,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삶에 대한 동경, 거꾸로 말하면 현실로부터의 도피 욕구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 우연히 '카우치서핑'이라는 것을 접했다. 휴학 중 뭐라도 했다는 것을 남기기 위해 다니던 영어 학원에서 만난 미국인 선생님 덕분이었다. 휴학 후 뭐 하고 있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막연히 유럽 여행을 가고 싶은데 돈이 없다는 정도로 대답한 것 같다. 그때 선생님은 '카우치서핑'이라는 게 있는데 여행자가 현지인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현지 문화를 가까이서 체험하며 여행할 수 있는 사이트라고 소개해줬다. 당시에는 낯선 사람과 생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비용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 더 중요했다. 때마침 '작년 혼자서 홍콩 여행도 해냈는데, 유럽 여행을 못할 게 뭐람!'이라는 자신감도 들었다. 여행 한 달을 남겨두고 비행기 표를 끊었고, 엄마에게 통보를 했다. 그때 엄마가 한 대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 다녀와!' 라니.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여자 혼자서 무슨 여행이야!'라고 나를 꾸짖으며 1주일 간의 홍콩 여행을 극구 만류하던 엄마는, 내가 홍콩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오고 난 뒤 딸을 믿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패기 있게 한 달 간의 유럽 배낭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여행 첫날, 위풍당당하게 개선문 앞에서 사진을 찍을 시간에 나는 비 오는 파리의 오페라 안 계단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나중에 개선문에 가서 사진도 찍었다(2012년, 구세주 나디르와 함께)
퇴근 후 연락을 준다 던 호스트는 밤 11시가 되어서야 술에 취해 전화가 왔다. 결국 그 호스트와는 만나지도 않았다. 잘 곳이 없어 여기저기 수소문해 잘 곳을 구했고, 새벽 1시가 넘어 모르는 사람의 집에 가서 말 그대로 카우치(소파)에서 1박을 하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봉사활동을 함께 한 프랑스 친구의 친구였다. 오페라 안 계단에서 한 껏 위축되어 2시간 넘게 앉아 있던 내게 구세주도 나타났다. 베트남에서 함께 봉사한 선배가 내가 프랑스에 여행 간다고 하니, 메신저로 소개해 준 프랑스 친구였다. '파리에 가면 호스트랑 여행하느라 만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라고 했었는데, 내가 도움을 구할 수 있던 유일한 친구였다. 일면식도 없는 나를 위해 친구는 집에서 2시간을 달려 파리에 왔다. 처음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나를 보자마자 꼭 안아줬고,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나를 데리고 카페에 가 따뜻한 커피와 빵을 사줬다. 그리고 하루 종일 나를 데리고 파리 시내 구경을 시켜준 것도 모자라, 잘 곳을 구해주었다. 자신의 친구에게 부탁해 내가 5일 동안 잘 곳을 마련해준 것이다. 아무리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지만, 카오스 속에서 나의 한 달간의 여행은 시작됐다.
오스트리아 카우치서핑 호스트 세잘과 그의 개 비앙카
우여곡절로 시작한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은 예상치 못한 상황들 투성이었다. 길을 헤매는 것은 기본이고, 잘 곳이 없어 떠돌기도 했고, 기차 파업으로 예정된 일정을 포기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카우치서핑 호스트는 거실을 내주었는데, 거실에서 호스트의 개와 함께 3일을 보내기도 했다. 여행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득했지만, 나는 우연히 만난 사람들 덕분에 감사히도 한 달간의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사람들은 낯선 이방인에게 집을 내주고, 음식을 제공해 주고, 길을 함께 찾아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계획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뜻하지 않은 소중한 인연을 얻었다. 덕분에 현지 문화를 더욱 가까이에서 체험할 수 있었으며, 일상생활에서는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여행자에게 기꺼이 집을 내어주는 사람들은 진정한 환대와 신뢰가 무엇인지 가르쳐줬다.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시작한 대화는 국적도, 인종도, 문화도 다른 우리가 결코 다르지 않은 사람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사랑, 직업, 돈 등 우리가 삶에서 나누는 고민은 비슷했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삶의 가치와 양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가 몰랐던 세계가 이렇게 넓구나.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그리고 내가 사는 방법만이 답은 아니구나'.
그렇게 나는 여행이 주는 대안적인 삶과 희망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 희망의 불빛을 내 삶에 옮겨 붙이고 싶었다. 방랑병에 불을 지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