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은 비슷한 걸 좋아하는 것 같아. 거리의 자동차도 검은색, 흰색 아니면 회색이고 남자 여자 헤어스타일도, 그때 그때 유행하는 옷도 다 비슷한 것 같아. 6년째 한국에 살고 있는 영국인 남자 친구는 아직도 우리들의 비슷한 모습이 신기한가 보다. 모든 게 평균으로 수렴하는 우리들의 선택은 생각보다 일상의 사소한 선택에도 퍼져 있구나.
2019년 12월, 나는 미국 서부의 중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매서운 겨울의 칼바람이 내 뺨을 할퀴었다. 아니, 캘리포니아는 따스한 햇살이 쨍쨍하게 비추고 겨울에도 나를 온화하게 보듬어 줄 줄 알았는데. 겨울 내내 껴입고 다니는 롱 패딩을 안 가져온 걸 뼈저리게 후회하던 찰나, 친구 집에 도착하니 너무나도 익숙한 무언가가 내 레이더망에 딱 걸렸다. 어둡고, 무릎을 여유롭게 덮는 기장에, 보기만 해도 폭신폭신하고 따뜻한 이불 같은 그것. 롱 패딩 아닌가...!
"미국에서도 롱 패딩이 유행이야? 한국에선 겨울에 롱 패딩 없으면 유행에 뒤처지는 느낌이야. 따뜻하기도 한데 내 쿨함이 사라진달까?'' 9,000km나 떨어진 미국에서 나는 한국산 롱 패딩을 발견하곤 너무 놀랐다. 'K-pop, K-뷰티를 넘어 K-롱 패딩까지 미국 진출인가?' 고개를 갸우뚱하던 중, 친구는 오히려 미국에서 유행해선 안 된다며 농담을 했다.
"아니, 미국엔 이런 디자인이 없어! 그래서 한국에 여행 갔을 때 아내 주려고 사 왔어. 미국에서 유행했으면 안 사 왔을 거야. 남들이랑 똑같은 걸 입으면 오히려 쿨하지 못하거든.' 이어 그는 작년 겨울 한국을 방문했을 때, 검은색 롱 패딩이 거리를 꽉 채운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모두 다른 사람인데, 모두 똑같은 스타일과 브랜드의 옷을 입고 있었어."
그게 놀랄 일인가? 우리의 쿨함이 친구에게 쿨하지 않다는 사실에 나는 더 놀랐다. 쿨하지 못해서 미안해. 어릴 적 나는 친구들로부터 소외당하기 싫어, 부모님께 매번 유행하는 물건을 사달라고 떼쓰곤 했다.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아이템 하나쯤은 들고 있어야 멋지니까. 나이키 운동화, 노스페이스 패딩, 떡볶이 코트 등 패션뿐만 아니라 가로본능 폰, MP3, 샤기 컷 등 시즌별로 유행하는 상품과 스타일을 빠르게 소비했다. 정말 내게 필요한 지, 나에게 어울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남들이 가진 아이템 하나쯤은 들고 있어야 쿨한 것 같았으니까.
어른이 돼서도 나의 소비 패턴과 미적 기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트렌드 속에 나는 트렌디한 사람으로 살아 남기 위해 그해 유행하는 아이템이나 유명한 브랜드 제품을 샀다. 배낭여행으로 떠난 여행에서도 해외 아울렛은 필수 코스. 사실 왜 그렇게 유행을 쫓아가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다들 사니까사고 싶었고, 그래야 친구들과의 대화에도 낄 수 있었다. 무언가를 사고 싶은 그 욕망이 순수한 내 내면의 욕망인지 타인의 욕망이 나의 욕망으로 주입된 건 지 질문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평균 인간, 보통의 존재가 된 나에게 여행 중 만난 서구 사회는 참 달랐다.
한국 사회는 남들이 가진 아이템 하나쯤은 들고 있어야 멋지다 여기는 사회이다. 그런데, 미국의 쿨함은 한국의 그것과는 달랐다. 남들과 달라야만 멋지다고 생각하는 사회. 친구는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외적인 개성을 표출하기 위해 남들과 달라지려고 노력하는데, 한국에서는 남들과 비슷한 것이 멋지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
다양한 개성과 정체성의 샌프란시스코 사람들에 관한 전시
"미국 사람들은 패션뿐만 아니라 삶의 곳곳에서 남들과 다름을 적극적으로 표출해. 남들과는 다른 헤어스타일, 남들이 가보지 못한 여행지, 남들과는 다른 스타일의 자동차 등 말 그대로 다른 게 쿨한 거지. 그래야 SNS에서도 주목받아" 덧붙여 그는 미국에서도 유행하는 브랜드가 있긴 하지만, 그 유행 안에서조차 사람들은 자기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려 애쓴다고 말했다.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타인으로부터 주목받고 싶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람들.3주간 미국 여행을 하면서 바라본 미국 사회는 친구가 말한 것과 일치했다. 거리에는 각양각색의 패션과 메이크업, 헤어스타일,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 등 다양한 개성이 넘쳐났다. 익숙한 장면에 3년 전 스웨덴에 살기 위해 처음 공항에 도착했던 날이 떠올랐다.
2016년 8월, 스웨덴에 도착한 첫날의 기억. Hej, Välkommen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낯선 언어만큼 낯선 사람들에 나는 혼자 둘러싸였다. 하늘색, 분홍색 머리, 문신한 사람들, 수염을 기른 남자들, 민머리의 여성과 남성, 장발 남성, 피어싱을 한 사람들 스웨덴 사람들이 가득했다. 내 기준에서 너무나도 튀는 스타일에 문신까지 한 모습을 보고 나는 신기한 기분과 동시에 공포감을 느꼈다. 이상한 사람들은 아닐까, 조폭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잔뜩 긴장하던 그날의 기억. 멀뚱히 서서 몰래 사람들을 염탐하던 나를 빼고는 아무도 서로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던 보통의 사람들. 합리적인 개인주의가 잘 자리 잡힌 미국이나 스웨덴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튀지 않고, 소수보단 다수가 되는 입장이 더 편하다. 소수가 되면 다수의 눈총을 받기도 하니까. 공동체주의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내 눈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삶의 무게 중심과 주도권을 스스로 잡을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보다 자유로운 느낌이었다.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받는 분위기도 인상 깊었지만, 특히 미국에서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점은 사람들이 낯선 타인에게 서슴없이 칭찬의 인사를 건넨다는 점이었다. '낯선 사람과는 말을 절대 섞지 마라' 어릴 적부터 귀에 못 박히게 들어온 엄마의 신신당부는 미국 사람들의 끝장나는 친화력 앞에서 끝장나버렸다.
"Your stockings look so cool"
유니폼 아래 형형색색의 무지개 줄무늬 스타킹을 입은 승무원에게 스타킹이 마음에 든다며 칭찬을 건네는 승객(이걸 입을 수 있다는 것도 가히 충격적이었다),
"Wow, that's amazing, what does that mean?" 타투를 한 승객에게 엄지를 척 들어 멋지다며 타투의 의밀 묻는 승무원, 거리에서 지나가던 낯선 이의 패션이나 헤어스타일을 보고 멋지다고 말하는 사람들. 한 번도 만나본 적도, 다시 만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낯선 타인의 마음에서 전해진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과, 자신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킬 용기를 줄 수 있구나. 당사자도 아닌 내 마음이 설레임에 이렇게 일렁이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
"나 너 립스틱 색깔 너무 마음에 들어. 너한테 정말 잘 어울려!"
거짓말처럼 3주간의 미국 여행을 마치고 공항에서 보안검색대를 향하던 중, 지나가던 미국 여성 분이 대뜸 칭찬을 건넸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녀가 건넨 칭찬 한마디에 마음이 선덕선덕 두근거렸다. 몇 년째 나는 한 로드 브랜드의 핫핑크 색의 립스틱만을 고집한다. 이 색이 가장 나한테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낯선 그녀의 한 마디는 한국에 돌아가서도, 유행이나 브랜드에 상관없이 내가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지켜나갈 용기를 주었다. 내가 언제 편안함을 느끼고, 어떤 모습이고 싶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등 내 안에서 발생하는 욕구들에 집중하고 표출해본 시간들. 적당한 나르시시즘은 인생에 필요하다.
나를 속박하는 엄격한 외적, 사회적 기준과 타인의 평가에 우리는 왜 그렇게 민감할까?
우리는 남이 내 삶을 대신 살아 주지 않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남과 나를 비교하는 데서 자유롭지 못하다. 질문의 화살을 나와 우리에게로 향하다, 다름에 대한 존중과 수용의 자세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자각이 들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를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건 다른 것이다.
한국인이란 검은색 머리와 눈동자 갈색 피부를 지닌 사람. 우리는 태어나 똑같은 교육을 받고,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정장을 입고 취업이라는 관문을 통과해, 똑같이 지어진 아파트에 살며 비슷한 속도로 살아간다. 어쩌면 우리가 다름을 낯설어하고, 남들과는 비슷한 선택을 하는 게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당연한 사실들이 우리를 행복하지 않게 한다면, 이 당연한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신호일 것이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여행 길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으로부터 배웠다. 그리고 이 배움은 나의 평범한 한국에서의 일상을 지탱하는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소설가 김영하는 저서 <여행의 이유>에서 여행을 통해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고 했다.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때문에 당연하게 여겼던 많은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익숙했던 일상이 낯설게 다가온다.
우리 모두 일상을 여행처럼 살자. 사소한 그 무언가라도 나를 속박하고 불편하게 하는 게 있다면, 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나를 탓하기보다 그 기준이 합당한 것인지 질문을 던지자. 내 잘 못이 아니라 내가 마주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 애초 주터 잘 못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모두 각양각색의 나나랜드를 꿈꿀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