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드라마 <런 온> 7~9회를 보고

by Journey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드라마 <런 온> 7~9회를 보면서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고 싶은 마음.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관계, 아마도 연인 관계가 아닐까요. 아무리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어도 그 관계가 모두 연인으로 발전하는 건 아니다 보니 서로 간에 명확한 정의, 의미 부여가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오미주와 기선겸은 이 시점에서 연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아직은 아니기에 기선겸이 말없이 외박하고 돌아왔을 때 오미주가 이런 말을 했겠죠.


그럼 나한테 기선겸씨 사생활 물어볼 권리가 있기는 하고?
어디냐, 뭐 하냐, 왜 안 오냐, 안 올 거냐, 이런 거를요?
. . .
권리가 인정이 돼야 안심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어요?


임시일지라도 동거인이니까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연락해서 '어디냐, 뭐 하냐, 왜 안 오냐, 안 올 거냐?' 이런 말을 물어볼 수도 있지 않나 싶다가도 지극히 사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쉽게 물어보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결국 다시 터져버리고 말죠.


선겸) 내가 분명히 안 긋는다고 얘기했잖아요.
미주) 근데 나는 왜 보이지도 않는 선 밖에 있는 거 같은 기분이 들죠? 지금?
선겸) 나는 오미주 씨가 긋지도 않은 선 밖에 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미주) 나도 그러고 싶어요.
선겸) 내가 재미 없어졌으면, 그냥 그렇다고 말을 해줘요.
미주) 기선겸 씨랑 있으면 결정적인 부분에서 꼭 소외당하는 기분 들 때가 있어서 그래서 그래요. 소외감이라는 게 혼자선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니까. 아, 진짜 싫다.
. . . 나 기선겸 씨 싫다고 한 거 아니에요. 내가 너무 지질한 소리를 하는 거 같아서 그거 싫다고 한 거예요. 나 싫어하지 마요.
선겸) 나 안 싫어해요. 나 계속 그거 하고 있어요. 좋아해 달라면서요.
미주) 아, 그거 나 부탁한 거 아니었는데, 용기 낸 거였는데...


이 장면을 보면서 어찌나 오미주에게 감정이입이 되던지요. 아마도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이 떠올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따뜻했던 5월의 어느 날 남편을 처음 만났습니다. 지인의 소개였는데 그때 저는 서울에 살았고 남편은 대전에 살았어요. 장거리 연애는 회의적이었던 터라 만나보겠냐 묻는 지인에게 '그분이 서울로 만나러 오신다고 하면 만나보겠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굳이 대전에서 서울까지 오진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지인에게 다시 연락이 왔어요. 저를 만나러 서울로 온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굉장히 적극적인 사람인가 보다 했는데 이 남자, 처음 전화한 날 만날 약속만 딱 잡고 만나기로 한 날까지 한 달 동안 연락이 없더라고요. 한 번 만나고 끝이겠구나 싶었습니다.

그 무렵 회사 일이 너무 바빠 매일 야근하던 때라 그냥 집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소개한 지인을 생각해서 만나서 밥만 먹고 들어오자 하고 약속 장소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왠 걸요. 그날 저는 밤 11시가 넘어 집에 들어왔습니다. 마침 연등행사를 하는 날이라 곳곳에서 길거리 공연도 하고 밤에는 화려한 연등 퍼레이드도 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게다가 처음 만났는데도 편안하고 무엇보다 대화가 잘 통해 이야기가 끊이질 않고 이어졌습니다. 결국 남편은 마지막 기차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갔어요.


그렇게 남편과 만나기 시작했는데 이 남자, 얼마나 표현이 서툰지요. 처음 만나고 나서 한 달이 넘도록 '사귀자'라고 안 하는 거예요. 심지어 나 홀로 여행으로 계획했던 2박 3일 경주 여행까지 따라와 놓고 말이죠. 남편과 만나기 전에 이미 잡아놓은 여행이었는데 친구들이랑 일정이 안 맞아서 혼자 가게 됐다고 하니까 걱정된다고 하더라고요. 몇 주 뒤면 출발이고 평일이니까 근무하는 날이라 당연히 못 간다고 할 거라고 예상을 하고 같이 가겠냐고 가볍게 농담을 던졌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남편이 그래도 되냐며 그럼 같이 가자고 하지 뮙니까. 얼마나 당황스럽던지요. 하지만 진지하게 대답하는 사람에게 농담한 거라고 말하기도 뻘쭘해 결국은 함께 갔습니다.


경주 여행 첫날, 석굴암에서 불국사 가는 길이 미끄러워 남편이 손을 내밀었고 제가 그 손을 잡았어요. 을 다 내려왔는데도 남편이 손을 안 놓는 거예요.

제가 헷갈리지 않겠습니까? 사귀기로 확실히 한 것도 아닌데 대체 우리는 연인인가 아닌가 혼자서 얼마나 고민을 했던지요. 그러니 제가 오미주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요.


먼저 대놓고 물어보자니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았지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답답함을 못 참은 제가 결국 물어봤답니다. 그랬더니 이 남자,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우리 지금 사귀고 있는 거다'라고요.

아니 언제부터? 나는 그런 말 못 들었는데? 알고 봤더니 '이 여자한테 사귀자고 얘기해야겠다'라고 생각하고서 저에게 손을 내민 거래요. 자기는 본인의 행동에, 말에 책임지려고 하는 편이라 아무 손이나 잡는 사람 아니라고 하면서요. 호감이 있으니까 (대전에서) 서울로 매주 간 거고, 전화도 오래 한 거고, 경주도 간다고 한 거래요. 사귀자는 한 마디면 될 것을 이리 돌려서 표현을 할 줄은 몰랐어요.


그냥 제가 먼저 사귀자고 말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남편이 좋았어요. 이 남자와 만나서 나누는 대화들이 참 좋았습니다. 오래오래 곁에 있고 싶었어요. 그런데 사귀자고 했다가 거절당하면 더 이상 이 남자를 만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두려웠어요.


고백하자면 저는 남편과 만난 지 3개월쯤 지난 어느 날 문득 '내가 이 남자랑 결혼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연애가 처음도 아니었는데 그런 생각이 강렬하게 든 건 처음이었어요.

저는 그런 마음이었는데 이후로도 남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연애하면서 "좋아한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거의 들어보질 못했어요. 제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느낌도 아니어서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긴 하는 건지 헷갈리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남편의 의중을 잘 모르겠으니 답답하고 조바심이 났던 거죠. 결국은 또 제가 당신이랑 결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어설픈 밀당 하다 인연을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알고 보니 이 남자,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을 하더라고요.

열악한 환경에서 숙박을 하는 오미주를 위해 전 스텝의 숙소를 옮겨주는 기선겸처럼요.

결혼 10년 차인 지금은 그걸 알지만 연애 초반에는 잘 몰랐으니까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했는지 몰라요.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허투루 하지 않는 기선겸을 보면서 연애 시절 남편의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괜스레 짠한 마음이 듭니다. 아마도 처음인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게 서툴러서 생기는 오해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픈 오미주를 지켜보면서 무서웠다고 하는 기선겸을 보면 오미주를 향한 그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느낍니다. 그 마음이 그대로 오미주에게 가닿으면 정말 좋을 텐데요. 아마도 서로의 속도가 맞춰지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한가 봅니다.

하지만 분명 기선겸의 사랑이 깊게 뿌리내린 나무처럼 흔들림 없이 오미주를 감싸 안는 날이 곧 오겠죠. 기선겸과 오미주가 서로의 꽃이 되는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표지 사진 출처 : JTBC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