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자유로움 발굴하기
다니는 미용실이 있다. 네이버예약에 혼자 프로필 사진이 없으셔서 선택한, 원장님을 뵌 지도 1년 2개월째. 노푸라서 미리 샴푸나 에센스 사용에 대한 미동의(?)와 양해를 구해두었다.
언젠가부터 자연스레 남편과 어머님도 같은 미용실에 간다. 그러다 보면 원장 혼자 일하시는 날(연중무휴, 대단합니다)에는 둘이나 셋이 동시에 머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워낙 꼼꼼하게 하시고 비용도 합리적… 아니 저렴해서 예약은 점점 어려워졌다.
예약 실패의 고배를 몇 번 마시자 남편은 마음에 안 든다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내겐 가장 편한 원장님이지만 불편하다는 그의 마음도 이해된다. 그렇다고 딱히 가고 싶은 다른 미용실은 없는데. 에잇. 내 머린 그냥 내가 자를까?
긴 머리 셀프커트와 달리 숏커트는 셀프가 쉽지 않다고들 한다. 하지만 얼마 전에 한 펌도 많이 남았고, 타인이 내 외모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아는 이상 해볼 만하다. 이럴 땐 유튜브 영상을 보는 게 최고지. 따라 해볼 법한 영상을 찾았다.
https://youtu.be/UWzIeGuN9eE?si=cXLzi748eQuC8xh3
오 잘 자른다, 하며 몇 번 돌려보니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느낌이 드는 건, 높은 확률로 해낼 수 있기 때문이란 걸 알기에 두근대며 휴일 저녁에 거사를 치르기로 결심했다.
욕실장 깊은 곳에 잠든 미용가위와 숱가위, 빗, 집게, 스펀지를 깨웠다. 긴 머리였을 때 한 번 쓴 커트보도 둘렀다. 가장 큰 문제는 이사 올 때부터 아무리 지워도 닦이지 않는 혼탁한 욕실 거울. 한 때 즐겨 찾던 빈티지샵에서 심하게 흐린 거울을 본 적이 있다. 그 후로는 맑지 않은 거울도 매력있다고 생각하게 되어(흐리면 흐린대로 보며 다른 느낌을 받아보자!) 그냥 쓰고 있지만 영 뭐가 보이지는 않는다.
정확히 못 잘라도 웨이브가 있으니 가려질거야. 처음 쥔 머리를 힘주어 서걱서걱 잘라냈다. 자르는 소리와 느낌이 생각보다 짜릿하다. 머리칼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진다. 한 번 자르니 그다음부터는 계속 자르고 싶다.
때로는 너무 썩둑 잘랐나 싶어 놀라다가, 대충 그린 밑그림을 선명하게 다듬듯 사각사각 머리길이를 맞췄다. 지우개로 지우듯 살살 누르며 숱을 치는 과정도 즐겁다. 원하는 만큼을 선택해 자르고, 몸에 대한 완벽한 주도권을 행사하는 과정이 누가 대신 잘라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만족감과 뼛속까지 깊은 개운함을 준다.
대망의 뒷머리는 손거울로 뒤를 자주 비추면서 잘랐다. 아, 역시 흐릿한 마성의 욕실 거울. 반투명 렌즈를 낀 기분으로 멀리서 남의 머리를 보듯 무심히 자를 수밖에. 엉성하면 어때, 개성은 살겠지.
단 오른손으로도, 왼손으로도 왼쪽 목덜미에서 왼쪽 귀로 이어지는 아랫라인은 자르기 어려웠다. 큰소리로 남편을 불러 다듬어달라고 부탁한다. 비뚤어진 것 같은데 거기 한 번만 잘라달라고 하니 웬걸 말없이 잘라주는 남편. 필요할 때 스윽 나타나는 그림자처럼 함께하는 사람이 있어 이럴 때 참 좋다.
커트하고 치우는 데 걸린 시간은 총 1시간 50분. 평소 미용실에 다녀올 때보다 50분쯤 더 걸렸지만
셀프 숏컷을 자를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고 오히려 돈을 번 기분이 상쾌하다.
미용실 예약신청 후 예약확정을 기다리고, 차를 가져가 주차할 곳을 찾고, 앞사람 머리가 끝나기를 기다리다, 옷과 가방을 맡긴 후, 지정된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에게 신체 일부인 머리를 맡기는 일.
무의식적으로 하거나 당연히 아웃소싱하던 일에서 불편을 느낀다면, 한번쯤 그 안에 숨겨진 자유로움을 직접 발굴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