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파티와 매장 오픈의 공통점
"... 여보세요... 으응? 벌써 왔어?"
연말을 기념해 베이킹스튜디오에 친구들을 불러 조촐한 수다 파티를 열기로 한 날. 약속만 하면 1시간 이상 일찍 오는 부지런한 친구가 그날은 2시간 먼저 도착했다. 소박하게나마 준비한다고 늦게 잤는데, 얼굴에 물도 못 묻힌 채 작업실 문을 열었다.
"어떡하지? 아직 아무것도 세팅 못했는데."
친구는 천천히 하라고 했지만 나는 손님을 곁에 두고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뭐 한 잔 마실래? 묻고 찻잎을 뜨는데 다른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도 일찍 왔다고 한다. 이런!
필요한 게 있으면 사 오겠다는 친구들에게 생수 몇 병을 부탁하고 그리시니* 를 꺼내 테이블 가운데 놓았다. 접시와 식기, 컵 등을 꺼내는데 또다시 딸랑- 종소리가 울린다. 세 번째 지인이 물을 사러 간 심부름꾼들과 함께 도착했다. 초대해놓고 준비도 안 했냐고 장난스레 이기죽거리면서.
오븐에 넣기만 하면 되는 라따뚜이**와 베이컨&로즈마리, 구워 먹을 통마늘과 와인 등을 꺼내자 친구들이 하나둘 팔을 걷어붙였다. 한 명 한 명이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 사이지만 서로 간에는 처음 만나는 상황. 당황한 호스트를 놀리며 그들 사이에는 물 흐르는 듯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냥 같이 준비하면 되잖아요."
"와인은 내가 딸게."
"언니, 내가 파스타 해줄게. 나 잘해~!"
음식을 함께 조리하고 모카포트에 커피를 내려 사과 타르트와 생크림 케이크까지 먹고 떠들썩했던 기억. 혼자서 미리, 전부 구상하려 애쓰기보다 함께 만드는 파티가 몇 배는 즐겁고 다이내믹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여러 사람이 즉흥적으로 그린 그림이 어느 순간 의외의 예술로 탄생하는 느낌이었달까? 모두의 참여로 허물없이 놀았던 하루, 지인들은 오픈을 축하한다며 각자 선물까지 주고 떠났다.
* 그리시니(Grissini) : 가늘고 긴 연필 모양으로 구운 이탈리아의 빵
** 라따뚜이(Ratatouille) :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에서 즐겨 먹는 채소 스튜
어느 날 남편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이 조용한 일상을 뒤흔들었다.
2018 서울 밤도깨비 야시장의 손님으로 와서 우리 푸드트럭의 명함을 받아간 손님이었다. 그는 직접 사서 맛본 티라미수와 우리 푸드트럭에서 좋은 인상을 받아 연락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광화문 인근에 매장을 할만한 자리가 있는데 한 번 와서 보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는, 당혹스러웠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었던 우리에게 매장이라는 화두는 적어도 3,4년은 더 지나야 논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변화가 필요했지만 보통 억 단위씩 드는 매장은 미루어둔 과제였다. 하지만 난데없이 이런 전화가 온 데는 어떤 순리가 작용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상황을 파악하러 남편과 일단 가보기로 했다.
도착한 장소는 프랜차이즈 팥빙수 전문점이었다. 팥빙수와 팥죽, 커피가 주력 메뉴로 간단한 조리시설 및 커피머신, 제빙기, 빙수기, 업소용 냉장고와 냉동고 등이 갖춰져 있었다. 본래 창고였던 공간을 임차인이 개조해서 매장으로 만들었으나 사정상 운영할 수 없어 지인들이 잠시 맡았고, 그들도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상황이었다.
테이블과 의자, 냉난방기까지 거의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으니 몸만 들어와 장사해보면 어떻겠냐고 그는 말했다. 굳이 프랜차이즈를 이어받지 않고 원하는 품목을 판매해도 상관없다는 말과 함께.
'이런 경우도 다 있구나!'
진지하게 고려하기로 하고 주변을 걸으며 상권을 둘러봤다. 고급 오피스텔 단지가 둘러싼 고즈넉하고 깨끗한 동네. 주거지라기보단 인근 직장인들의 유입이 있을 듯한 지역이었다.
장사가 어느 정도 이뤄지는 곳인지 알아보기 위해 며칠 후 다시 가게를 찾았다. 일하시는 분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커피를 한 잔씩 주문한 다음, 자리에서 손님들을 살폈다. 비 오는 날씨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점심 시간대에 테이블이 거의 꽉 찼다. 골목 안쪽이라서인지 조용한 곳을 찾아온 듯한 점잖은 사람이 많아 보였고, 주문하는 취향은 제각각. 저녁 시간대는 어떤지 궁금했지만 남의 가게에서 오래 그러고 있기가 영 불편했기에, 점심시간과 어느 정도 비슷하겠지 생각하며 가게를 나왔다.
월 차임은 높았지만 새로 만든 공간과 시설, 집기에 대한 비용을 후불해도 좋다는 말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던 일을 계속하며 돈을 모아 언젠가 완벽하게 꾸민 매장을 차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곳을 손보아서 몇 년을 앞당겨 매장을 운영해본다면 그만큼 빨리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곧 푸드트럭의 비수기이자 동면기인 겨울도 닥칠 터였다.
최악의 최악을 가정해봤지만 큰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경험에 투자하자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결국 임대인의 동의를 얻어 임차인과 전대 계약을 맺었다. 전대인(=임차인)은 가게를 운영 중인 지인들이 나가면 공백 없이 장사를 바로 시작해주길 바랐지만, 낯선 장소와 시설에서 갑자기 장사는 무리였다. 일주일의 말미를 얻었지만 하던 일들을 정리하고 최소한의 준비를 하기에도 짧아서, 우선 가오픈으로 시작해 보완하기로 마음먹었다.
믿을 수 없지만 그렇게 우리에게 매장이 생겼다.
매장 이름은 <뒤주르>. 뒤주르 Du Jour 란 '오늘 준비가 된 음식' 또는 '오늘의'라는 열린 의미로 사용할 수 있는 프랑스 단어였다. 갑자기 매장을 꾸리게 된 우리에게는 오늘에 충실한 태도가 필요했다. 매일 조금씩 다른 음식을 선보여 스스로와 손님들의 감각을 일깨우고 싶기도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잠재된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올리기에는 디저트를 중심으로 간단한 식사까지 가능한 '디저트 비스트로'가 이상적이었다. 디저트 비스트로 Dessert Bistro란 내가 만든 사심 충만한 용어다. 제과와 제빵 품목을 주식으로 먹는 사람들을 위한 장소이자, 주식과 후식의 경계가 없는 공간이라는 의미였다.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는 메뉴 선정. 음료는 직접 만든 레시피를 많이 가지고 있어 조금만 수정하면 된다. 디저트는? 판매해온 티라미수와 스콘, 마카롱 등의 클래식한 품목을 중심으로 적당한 크기와 가격을 정했다. 그중에서도 티라미수는 짠맛이 있는 미국산 크림치즈 대신 마스카르포네 치즈*를 넣어 부드럽고 섬세한 맛을 느낄 수 있게 업그레이드했다. 야외에서 먹는 것과 실내에서 먹는 것에는 음미의 정도차가 존재하기에. 마지막으로 런던 여행 후 연구해온 비건과 로푸드**품목도 추가해 주변 매장들과의 차별을 꾀했다.
거기에 간단한 식사로 평소에 곧잘 해 먹던 브루스게타***, 프랑스식 단호박 크림수프, 키슈****까지 준비했다. 복잡하고 화려한 음식보다는 유기농이나 친환경 재료로 집에서 해 먹는 듯한 음식을 내고 싶었다.
*마스카르포네 치즈(Mascarpone Cheese) :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크림치즈. 짠맛과 치즈 특유의 냄새가 없고 맛이 섬세하다.
**로푸드(Raw Food) : 식재료에 열을 가하지 않고 효소와 영양소를 그대로 살려 만드는 요리
***브루스게타(Bruschetta) : 납작하게 잘라 구운 빵 위에 각종 재료를 얹어 먹는 이탈리아의 전채요리
****키슈(Quiche) : 달걀과 크림을 사용해 만드는 프랑스 알자스, 로렌 지방의 향토 요리
주방이 협소해서 매장 앞쪽에 베이킹 부스를 따로 만들고 수도를 끌어왔다. 기존에 작업을 하던 베이킹 스튜디오도 빠르게 정리해나갔다. 대신 새로 만든 유리 부스에 Baking Studio라는 스티커를 붙이자, 필요한 것들이 손만 뻗으면 닿는 미니 작업실이 탄생했다.
공사를 하는 동안 사업자 등록과 각종 인허가 절차를 마치러 뛰어다녀도 일주일은 그것을 끝내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업체를 불러 오븐을 세척하고 내부 곳곳의 인테리어, 창고정리, 포스기 입력, 메뉴판 제작, 그리고 밤도깨비 야시장의 마무리를 병행했다. 밤을 새도 모자랄 시간들이 스쳐갔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앞날에 대한 벅찬 설렘이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을 마구 펌프질하고 있었으리라.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2018년 11월 1일, 질끈 눈을 감고 문을 열었다.
기존 매장에 오던 손님들과 가오픈 안내문에 궁금증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 둘 매장으로 들어왔다. 베이킹 스튜디오에서 작은 파티를 열었던 연말의 그 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세수도 못한 채 일찍 들이닥친 손님을 맞았던... 기존의 매장과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답답하고 속상하기도 했다. 팥빙수와 팥죽을 먹으러 찾아온 손님들께는 가게가 바뀌었음을 여러 번 말씀드려 돌려보내야 했다.
가오픈 기간 동안 만난 손님들의 도움으로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지역 고객들의 연령대와 니즈, 인근 매장들과 비교했을 때의 경쟁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점심 시간대에 방문하는 손님은 꽤 있어도 저녁에는 매장 쪽으로 오지 않고 바로 퇴근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집에 가는 직장인들의 발길을 돌리려면 와인이나 맥주 판매도 고려해야 할 위치였던 것이다. 매장은 우리의 준비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위층에 계신 필라테스 원장님(전화로 매장을 소개하신 분)은 수시로 드나들며 메뉴와 가게 전반에 대해 조언해 주시고, 왼편 저택에 사는 할아버지께서는 이웃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바깥에 장식할 수 있는 전구들을 사주셨다. 오른편에서 다른 카페를 하시는 사장님 내외는 우리를 경계하는 대신 잘 버티라며 격려해 주셨다. 다양한 관심이 이제 막 부풀기 시작한 풍선 같은 가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일주일이 더 지나서야 기존의 팥빙수 전문점 간판을 철거하고 밝은 버건디 색 차양을 달았다. 어닝 아래쪽에 디저트 비스트로 뒤 주르 Dessert Bistro Du Jour라는 글씨를 넣었다. 비로소 가게가 새 옷을 입은 것이다.
열흘 정도 가게에서 움직여 보니 공간 배치도 달라질 필요가 있고, 쇼케이스도 작아서 큰 것을 주문해야 할 것 같았다. 디저트를 돋보이게 할 3단 쇼케이스가 도착하는 대로 가오픈을 끝내자고 다짐했다. 한 달 하고도 23일의 가오픈 동안 경험한 매장은 사람들의 관심과 개성을 흡수하며 자라는 유기체 같았다. 공사를 하러 오신 분들부터 손님들과 다정한 이웃들을 만나, 하루하루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경이롭고 흥분되는.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정식 오픈일. 우리는 이웃분들께 떡 대신 슈톨렌 Stollen이라는 하얀 독일식 과일 케이크를 돌리며 출발 인사를 드렸다. 함께 파티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