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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Jan 16. 2024

음악감상실에서 생긴 일

잃어버린 것들의 발견


 일찍 일을 마치고 남편과 시흥에 갔다. 평택에서 오후 4시 30분에 출발해 도착하니 6시 31분. 언제나처럼 긴 패딩에 머리까지 풀어내려 나보다 더 MZ같은 엄마와 만났다. 엄마의 생일 이브날.


 차를 타고 소래산 아래 위치한 브런치 카페 도착. 미리 조그만 쌀케이크를 만들어갔는데 상자를 열어보니 오랜 이동으로 갸우뚱해졌다. 너무 오랜만에 만난 모녀의 대화도 조금씩 삐걱거린다. 편하게 왕래하기에 좀 멀긴 해도 자주 만나야 케이크도 대화도 평안하련만.


 식사를 마치고 미리 알아본 근처 음악감상실로 향했다. 파주의 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 방문 이후로는 처음이다. 예술 감상을 목적으로 한 공간을 여는 일은 특히 개인이라면, 웬만한 애정과 전문성으로는 어려운 것 같다. LP바나 LP카페가 아닌 그저 청음을 위한 감상실이 전국적으로 드문 걸 보면. 시흥에서 가볼 만한 곳을 찾다가 우연히 음악감상실을 발견했을 때의 반가움이란.


 [온]이라는 이름의 감상실은 아파트 상가 1층에 있었다. 넓지 않은 공간이 아늑하다. 입장료에 마실거리가 포함되어 한 잔씩 부탁드리고 스피커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탁자 위에 놓인 메모지와 연필을 만지작거리다 부드럽게 무뎌진 연필로 생각해 온 신청곡을 썼다.



1) 겨울아이 - 이종용 (어머니 생신)

2) 비킹구르 울라프손 - 편하신 걸로 부탁드려요. (클래식 좋아합니다. 하트)


 

축구 선수 손'홍'민과 손'흥'민을 여전히 헷갈리는 나는 '올'라프손을 또 '울'라프손으로 쓴다.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일에 언제쯤 재능이 생길까. 처음 듣는 진하고 몽환적인 곡(찾아보니 '검정치마'라는 가수의)이 홀을 채우는 사이 어느새 신청한 이종용의 LP가 앞에 놓였다. 섬세한 사장님의 손길을 받은 스피커가 볼륨을 높여 축하곡을 토해낸다.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눈처럼 깨끗한 나만의 당신

...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당신의 생일을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to you Happy Birthday to you

...


 귀를 활짝 열고 들으니 처음 듣는 듯 생소하다. 전구색 조명이 환하게 켜진 곳에서 열리는 축제같은 느낌의 노래. 엄마 얼굴도 미소로 밝아졌다.


 이후로도 사장님의 배려로 엄마 취향의 노래 - <찻잔>, <비와 당신>등 - 가 몇 곡 더 나오고 드디어 Vikingur Olafsson의 피아노 연주도 나오기 시작했다. 올라프손의 연주곡들을 다 알지 못하기에 사장님의 선곡이 궁금했는데, 드뷔시의 프렐류드 <Canope>, <Bruyere> 그리고 숨은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축복받은 소녀(la damoiselle élue, Hania Rani rework)>를 들려주신다.


 다른 감상자분들이 괜찮으신지 걱정될  정도로 내향적이고 절제된 곡들이지만 음악과 스스로에게 집중하려 짐짓 애썼다. 그러다 마지막에 나온 La damoiselle élue의 후반부에서 아주 서서히, 오팔빛의 호수 같은 평안 속으로 빠져들었다. 걱정을 모두 내려놓고 공기처럼 가볍게 사라질 수 있을 듯한 승화의 감정이 처음 맞는 축복처럼 사뿐히 마중을 나왔다.


 

 무척 고요해진 분위기를 환기하듯 다시 신나는 곡들이 나와 제 할 일을 한다. 그러다 문득 그립고도 압도적인 명곡의 노크 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왔다. 겨울잠을 자려다 코마에 빠져버린 듯한, 내 클래식 감수성을 완전히 깨우겠다는 듯 멀리서 한 발짝씩 다가오는 타건 소리.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서서히 다가와 폭풍처럼 강렬하게 휘몰아치며 모든 상념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협주! 무겁고 치열하며 화려한 선율 속에, 켜켜이 쌓아온 삶의 고난과 치졸과 욕됨이 구정물처럼 씻겨나간다. 말보다 글에 한 사람의 생각을 농도 짙게 담을 수 있다면, 노래보다는 곡 자체에 훨씬 풍부한 감정을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힘있게 감싸안는 공감과 위로 너머 희붐한 카타르시스만이 존재하는 아름다운 세계에 결국 도달하고 말았으니.


 엄마에게 다음 날 중요한 일정이 있어 아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시된 앨범 가까이 다가가 연주자를 확인하니 피아니스트 페터 뢰젤 Peter Rosel. 모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털이 쭈뼛 서기도 하는 기분을 온전히 느끼게 해 준 연주자와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사장님(이라는 단어가 좀 불편하고 실장님이라는 표현도 이상하지만)과 멋진 스피커에 감사했다. 다른 생각없이 집중해서 음악을 듣는 황홀함을 한동안 잊고 있었구나.


‘이렇게 좋고 아름다운 것을 다신 외면하지 마. 마음껏 동경하고 사랑해. 생의 마지막에 남는 건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뿐이니까.’


 새벽 내내 잠이 오지 않아 힘들긴 했지만 그날은 기절하듯 잠드는 대신 얕은 잠 속에서 말도 안 되는 꿈을 길게 꾸었다. 말이 안 되는 꿈이야말로 제맛이다.잃어버린 꿈과 함께 다정한 옛 친구들도 돌아왔다. 영원히 잠들어버렸으면 하고 여길만큼 철저히 혼자라고 느낄 때 말없이 손 내미는 - 클래식 음악 친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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