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룩, 탐관오리
벼룩(flea)은 포유류나 조류의 피를 빨아 먹고 산다. 포유류니까 당연히 우리 피도 먹는다.
벼룩 같은 놈들을 ‘기생 생물’이라 부른다. 기생 생물에게 영양을 제공하는 우리는?
숙주(宿主).
벼룩에게 인간은 숙주, 인간에게 벼룩은 기생 생물.
벼룩은 숙주의 피부를 뚫은 후, 모세혈관을 터뜨려 피의 만찬을 즐긴다. 여기서 나올 수 있는 질문, 터진 모세혈관은 금방 굳어 버리잖아?
맞다.
그래서 벼룩의 침에는 숙주의 혈액을 굳지 못하게 하는 성분이 들어 있다. 침을 발라 숙주의 피를 굳지 않게 하는 동시에 피를 빠는 멀티태스킹(multitasking).
그래서 벼룩, 덩치는 벼룩만 해도 상당한 능력자.
爾俸爾祿 이봉이녹
民脂民膏 민지민고
下民易虐 하민역학
上天難欺 상천난기
네가 받는 월급과 보너스는
백성의 기름이고 백성의 살이다.
백성들은 학대하기가 쉽지만
하늘은 속이기가 어렵다.
송나라 태종 황제가 모든 관청에 내린 비석의 글귀다. ‘명심보감’에도 들어 있다.
정치인과 공무원들, 똑바로 하라는 말.
한양을 방문한 명나라 장수가 광해군의 악정(惡政)을 비꼬며 지은 시다.
향내 나는 맛있는 술은 천 사람의 피고
최고급 안주는 만백성의 고혈이네.
촛농이 떨어질 때 사람 눈물 떨어지고
노랫소리 높은 곳에 원성 높도다.
‘춘향전’은 이 둘을 인용, 짬뽕한다.
金樽美酒千人血 금준미주천인혈
玉盤佳肴萬姓膏 옥반가효만성고
燭淚落時民淚落 촉루낙시민루락
歌聲高處怨聲高 가성고처원성고
금술통의 맛있는 술은 천 명의 피고,
옥쟁반의 좋은 안주는 만 명의 기름이다.
촛불의 눈물(즉,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도 떨어진다.
노래 소리 높은 곳에 (백성들의) 원망 소리도 높다.
전라남도 남원의 최고 권력자 변학도가 자신의 생일을 맞아 초호화 파티를 개최하자, 춘향의 남친 이몽룡, 사실은 암행어사지만 거지로 변장, 변학도를 향해 날린 시(詩)다.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사악한 탐관오리라는 것.
탐관오리(貪官汚吏), 백성의 재물을 탐내어 빼앗는 더러운 관리.
백성들의 살과 피를 쭉쭉 빨아대는 변학도에 비하면 모세혈관을 살짝 건드리는 벼룩 정도야, 라고 관대하게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페스트에 걸린 쥐의 피를 건드리면 사정이 달라진다.
중앙아시아,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 동부에 사는 설치류(齧齒類 쥐, 다람쥐, 햄스터, 기니피그, 비버 등)들에게 이따금씩 발생하던 질병이 페스트였다.
원인균, 즉 페스트를 일으키는 주인공은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라는 세균.
그냥 ‘페스트균’이라 해도 의미는 통한다.
페스트에 감염된 쥐의 피를 빨면 벼룩 역시 페스트에 걸린다.
벼룩 속으로 들어간 페스트균은 벼룩의 식도를 막아 버린다. 그리고 침샘으로 이동.
식도가 막히면 당연히, 아무리 먹어도 삼킬 수가 없다. 아사(餓死) 위기.
자신의 몸 상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벼룩은 점점 쪼그라드는 배를 채우기 위해 미친 듯 쥐의 몸을 물어뜯는다.
이때 침샘에 있던 페스트균은 다시 쥐의 몸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원래 쥐라면 본전이고, 다른 쥐라면 페스트균의 확산.
벼룩처럼 빈대나 이도 숙주의 피를 빨아 먹고 산다.
하지만 빈대나 이는 의리가 있다.
숙주가 죽으면 같이 죽음을 맞이한다. 대부분은.
벼룩은 영악하다. 숙주가 죽어 체온이 떨어지는 기미가 보이면 주저 없이 다른 숙주로 옮겨 간다.
페스트균의 확산!
페스트에 감염된 벼룩에 물리거나, 그런 벼룩을 먹은 작은 동물과 접촉함으로써 인간도 페스트에 걸린다.
이런 경로로 인간의 몸에 들어오는 페스트를 특별히 ‘선페스트(bubonic pest)’라 부른다.
피부나 점막을 통해 인간의 몸으로 들어온 선페스트균은 림프관을 타고 신속히 림프절로 이동한다.
● 림프관(lymph duct) : 림프액이 이동하는 관(管)
● 림프절(lymph node) : 면역 기관의 일종. 림프관을 타고 들어온 병원균을 발견하면 면역반응을 일으켜 병원균을 공격한다. 림프절은 전신에 분포하지만 겨드랑이, 사타구니, 목구멍 등에 특히 많다.
림프절에 도착한 페스트균이 몸집 불리기에 나서면, 우리 혈액 속의 대식세포(大食細胞 macrophage 백혈구의 일종)가 바로 공격에 나선다.
하지만 영악한 페스트균, 싸우러 온 대식세포에 자신의 단백질을 주입, 대식세포를 바보 비슷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 과정에서 림프절이 심하게 붓고 견디기 힘든 통증이 인간을 강타한다.
아무런 방해 없이 숫자를 불린 페스트균은 혈관을 통해 신체 곳곳으로 퍼져 나간다.
고열, 오한(惡寒), 구토, 설사는 기본. 혈류가 막혀 발가락이나 손가락이 썩고, 코가 썩기도 한다.
이때쯤이면 피부로 피가 스며 나와 장밋빛 멍울이 생긴다.
결국엔 각 장기의 혈관을 손상시키거나 심장을 공격함으로써 피를 토하며 사망에 이르게 한다.
페스트균(선페스트)이 폐를 침범해 증식하면 심한 염증을 일으킨다. 기침과 가래가 시작된다는 말.
감염자가 기침할 때마다, 가래를 뱉을 때마다, 수백만 마리의 페스트균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다른 사람을 감염시킨다. 이를 ‘폐페스트(pneumonic pest)’라 따로 구분한다.
벼룩도 필요 없고, 혈액도 필요 없고, 접촉도 필요 없다. 그냥 폐에서 폐로, 공기를 통해 바로 감염된다. 그래서 선페스트도 무섭지만 폐페스트는 더 무섭다.
치료받지 않을 경우 선페스트의 치사율은 50%, 폐페스트는 90%에 이른다. 최선의 치료를 받아도 치사율이 높은 편이다.
1980년부터 1994년 사이 전 세계적으로 18,749명이 감염되었고, 그중에 1,853명이 사망했다는 통계가 있다. 통계에 잡힌 것만 이 정도라는 뜻이다. 보고되지 않은 감염자와 사망자가 더 있을 수 있다.
요즘에는 약이 잘 개발되어 있어 감염 초기에 항생제를 맞으면 거의 대부분 목숨을 건질 수 있다.
하지만 기존 항생제에 면역이 생긴 페스트균이 등장하거나, 인공적으로 조작한 페스트균이 등장하면 심각한 위험이 될 수 있다.
인공적으로 조작한 페스트균?
화학무기를 말한다.
20세기 초 일본 관동군 731부대는 페스트에 걸린 벼룩으로 무기를 만들었다.
소련은 페스트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1,000명 이상의 과학자들을 동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