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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엘 Jan 15. 2021

마녀 사냥 7 (끝)

역-마녀사냥


1563년 요한 바이어가 ‘주술에 관해서’라는 논문을 통해 주장한다. 


_ 마녀는 위험하지 않은 노파다. 

_ 정신장애로 고통 받고 있을 뿐이다.      

  

네 주장도 일리가 있네, 라는 훈훈함 대신 당대 지식인들은 바이어를 마녀로 몰았다.

 

혐의자들의 자백들에서 유사점이 발견된다는 것이 마녀가 존재한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반박하면서.     

  

마녀 수사관들은 없는 죄를 자백받기 위해 온갖 협박과 고문을 가했고, 대부분의 경우 '자백'을 받아 냈다.

  

고문에 못 이긴 거짓 자백이었지만 유죄 판결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마녀가 존재함을 더 확실히 믿게 되었다.

  

고야


권력자들이 주도한 마녀사냥이었지만 칼끝은 때로 권력자를 향하기도 했다. 고문 당한 ‘마녀’의 입에서 권력자의 이름이 불쑥 나오기도 했기 때문.

  

1611년 독일, 마녀 혐의로 고문받던 70세 노파의 입에서 상류층 인사들의 이름이 줄줄 흘러나온다. 무려 200명 이상.

  

겁에 질린 사람들은 지레 죄를 자백했고, 마녀와는 상당히 무관해 보이는 목사 몇 명도 잡혀 왔다.

  

부인이 마녀로 몰리자 격렬히 항의하던 한 판사는, 자신마저 마녀로 몰려 고문당했고, 결국 마녀임을 자백한 후 처형당했다.       



- 막강한 인맥을 보유한 명문가 출신

- 전직 대학 총장

- 현직 판사     


마녀 재판을 담당했던 디트리히 플라데의 스펙이다. 


그가 남달랐던 점은, 다른 재판관들과 달리 오직 객관적인 증거에 의해서만 마녀를 처벌했다는 점.


마녀사냥이 광기임을 직시하고 있었다.   


마녀사냥에 열정을 쏟던 피터 빈스펠트 주교와 요한 잔트 지사로서는 답답한 노릇. 마녀사냥의 광기에 푹 빠져 있던 일반인들 역시 마찬가지.



세상 물정 전혀 모를 것 같은 한 소년이 플라데를 고발한다. 대주교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것. 


마녀로 결정되어 화형을 앞두고 있던 노파 역시 그를 마녀라고 지목했다. 그 대가로 노파는, 극도로 괴로운 화형 대신 덜 고통스러운 교수형을 따낼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조작된 고발이 이어졌다.


플라데는 체포되었고, 고문에 굴복했고, 줄줄이 마녀들을 생산해 내야 했다.


플라데의 몸을 타고 오르는 화염 앞에서 빈스펠트와 잔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플라데가 선물한 두툼한 고발 목록을 손에 쥐고서.     

  


마녀로 몰린 사람은, 그래 이왕 죽을 거 평소 맺힌 원한이나 풀고 가자며 미운 사람을 마녀로 지목하기도 했다. 


자신을 마녀로 판정한 재판관 전원을 마녀라 지목하고 장렬히 불타 죽는 사람도 등장했다. 


돈, 돈, 항상 돈이 문제다. 돈을 노리고 마녀 혐의를 씌운 경우도 있었다.

  

상당히 많았다.          

  


1438년 프랑스 남부. 가만 두어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 피에르 발랑이 체포된다.

  

변명은 일체 허용되지 않고 모진 고문만 허용.

  

다른 혐의자들과 별반 차이 없는, 전형적인 자백이 흘러나왔다. 


- 나는 63년간 악마를 섬겨 왔다.

- 악마에게 무릎 꿇었고, 그를 찬미했다.

- 십자가를 짓밟고 침을 뱉었다.

- 딸을 제물로 바쳤다.

- 어린아이의 고기를 먹었다.     

   

발랑은 유죄를 선고받고 그의 재산은 몰수된다. 재판 비용을 뺀 3분의 1이 대주교와 마녀 재판소 몫으로 배분되었다.

  

재판관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주일간의 고문 끝에 발랑의 공범자들이 탄생한다.     

  

  가난한 사람, 사제, 귀족, 부자 

  

모두 화형당했고 재산은 고스란히 몰수되었다.



모두가 Yes라고 할 때 혼자서 No를 외치는 사람, 종종 있는 법이다. 갈릴레이의 경우처럼 그 No가 진리인 경우도 제법 있고.


‘수상록’으로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1533~1592)가 마녀사냥에 딴지, 아니 딴죽을 건다.     

  

“억측에 근거해 인간을 산 채로 태워 죽이는 것은 우리의 억측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도 마녀사냥은 지속되었다. 1550~1650년은 마녀사냥 극성기.     

  

게오르게 그로스


데카르트(1596~1650)가 일으킨 철학 혁명.

  

그리고 뒤를 이은 과학실증주의와 계몽주의가 힘을 발휘하면서 마녀사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도 차츰 변하기 시작한다.

  

문화가 발달한 나라, 문화가 세련된 도시를 중심으로 마녀사냥은 급격히 쇠퇴한다.               


법학자 겸 철학자 크리스티안 토마지우스(1655~1728).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 법학 교수였던 그도 처음에는 마녀의 존재를 믿었다.


그의 고백이다.


“마녀의 존재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1694년 한 여인의 마녀재판을 맡았을 때 피고인이 유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정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동료 교수들은 내용을 수긍할 수 없었다. 억지라는 것.

  

여인은 풀려났고 토마지우스는 비웃음을 샀다. 


경력에 가해진 깊은 칼자국.    


메니코 페티. '우울'

  

다른 사람 같으면 마녀 탓, 동료 교수 탓을 했겠지만 토마지우스는 스스로의 내면을 성찰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마녀에 대해 시중에 떠돌던 소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자신의 오류를.

  

자신이 ‘권위에 의거한 논증’ 오류에 빠졌다고 깨달았다.     

  

우리가 어떤 결론을 ‘전문가의 권위 있는 판단’에 근거하여 타당하다고 주장할 경우, 오류가 아니다.

  

우리가 모르는 분야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적극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해당 전문가가 ‘담당하는 영역’을 벗어난 문제에 대해서도 그의 의견에 호소한다면, 당연히 오류다.

  

이것을 ‘권위에 의거한 논증의 오류’라 부른다.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은 두말할 것 없는 물리학의 대가. 물리학에 관해서라면 이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맞다.

  

하지만 종교에 대해서는 다르다. 이들이 종교나 종교학에 전문가라는 증거는 없다. 따라서.

  

종교에 관한 그들의 의견은,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는구나, 에서 그쳐야지, 저 사람들이 물리학의 대가니까 종교에도 전문가일 거야, 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채널이 많아진 요즘, 온갖 전문가들이 TV에 출연한다. 그런데.

  

성형외과 의사가 고부 갈등에 해법을 제시하고, 변호사가 건강 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평한다.

  

인문학 비(非)전공자가 ‘~ 인문학’, ‘인문학 ~’ 류의 책을 쓰고, 강연하고, 거기에 군중이 열광하는... ‘폭스 뉴스’ 같은 코미디도 벌어진다.          



폭스 뉴스(Fox News)?  


_ 공정성 없음 

_ 객관성 없음 

_ 진실성 없음 

_ 윤리성 없음


_ 언론 윤리를 아예 무시하니 비용이 절약됨. 제작에 투입되는 비용이 다른 언론사의 절반 이하.


_ 도대체 있는 건 뭔데? 


_ 단순, 무식, 과격, 왜곡 

_ 이런 것들을 바탕으로 한 ‘재미’.          



_ 그래서 ‘Faux News (짝퉁 뉴스)’라 불림. 그런데.


_ 이런 뉴스를 보는 미국인들, 꽤 많음. 


_ 한국에도 ‘폭스’스러운 언론 있음. 꽤 많음.           

  


어쨌든 다시 본문.     

  

물론 그들도 다른 분야에 의견이 있을 수 있고, 훌륭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의사와 변호사라는 명함 때문에, 그들의 유명세 때문에 다른 분야에도 능통하겠지, 라는 생각 - 큰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특정 음료수를 들고 그 음료수를 마시도록 독려하는 것.

  

유명인이 자기 분야와 무관한 상품을 광고하는 것.     

  

권위에 의거한 논증의 오류다.     

  


애플이 샴푸도 잘 만들까?


  

애플 과일가게는?     



그냥 웃자.          



크리스티안 토마지우스.     

  

1702년 ‘마술이라는 악습에 대한 몇 가지 짧은 명제’라는 글을 발표한다.

  

마녀는 존재하지 않으며 마녀재판은 금지되어야 한다는 주장.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했다.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었다.     


피카소.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화'


효과가 있었다.


그의 주장은 독일 전체로 퍼져 나갔고, 마녀재판이 사라지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마녀사냥의 광기는 17세기 중반부터 꺾이기 시작한다.

  

정부 역시 마녀사냥이 오히려 사회를 파괴한다는 인식을 갖기 시작했고.          


  

여론, 보수적 지식인, 완고(頑固)한 재판관들의 저항이 있기는 했지만 대세는 마녀사냥이 사냥되어야 한다는 쪽.

  

1700년 이후 유죄판결을 받는 마녀의 수는 급속히 감소한다.

  

1650년부터 1750년 사이 마녀사냥은 힘을 잃어 갔다.     


조지 벨로우


18세기에는 전설, 문학, 농담 이외의 분야에서 마녀사냥을 찾기 힘들어졌다.     

  

프랑스 계몽주의 운동의 선구자 볼테르(1694~1778)가 자신이 집필한 철학사전에서 한탄한 말이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귀신 들린 자도, 마술사도, 점성술사도, 정령(精靈)도 존재하지 않는다. 

  

100년 전에는 무엇을 근거로 이 모든 것들이 가능했을까?

  

귀족들은 모두 성채(城砦)에 갇혀 지냈고, 겨울밤은 길었다.

  

이 귀중한 장난감이 없었다면 모두 권태로워 죽었으리라.”      

  


그런데, 마녀사냥은 정말 끝난 것일까?


     

정말?



(* 마녀사냥의 2021 버전은 신박하다. 자신이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며 소박하고 평범한 상식인들을 역-마녀사냥한다.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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