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리는
자국 영토 밖에서 전쟁을 앞둔 나라가 있다.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전쟁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양쪽 다 나름,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내린 결론.
찬성론이 이겼다. 파병 결정.
모든 자원을 동원해 전쟁에 돌입한다. 그런데.
전쟁 수행에 들어가는 돈이 예상을 크게 웃돈다. 시작 때와 달리 동맹국들의 협조도 시원찮다.
군인들의 희생은 계속 늘어 가고.
국내외 여론마저 전쟁 비판론으로 기운다.
이때 전쟁 찬성론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판단 중지’가 필요하다.
전문 용어로 말하면 ‘에포케(epoche)’. 그리스어다.
판단 중지.
뇌(腦)를 비우라는 것이 아니라 기존 사고방식을 잠시 멈추고, 새롭게 변화된 상황에 맞춰, 전쟁을 계속해야 할 이유를 다방면으로 찾아보는 것.
에포케.
가던 길을 ‘의도적으로’ 멈추고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라고 자문할 수 있는 존재, 인간밖에 없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전쟁 찬성론자들의 뇌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전쟁을 멈추어야 할 이유가 속속 드러난다. 여론도 전쟁 중지가 대세.
그런데도 전쟁 찬성론자들의 뇌는 전쟁을 합리화해 줄 이유만 찾아 나선다.
그렇게 하다 보면 희한하게도 전쟁을 계속해야 할 이유만 보인다.
우리 뇌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성향이 있으므로.
전쟁은 지속되고 나라는 수렁으로 빠져든다.
이런 현상은 국가, 기업, 개인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목격할 수 있다.
무리한 정책에 천문학 사이즈의 예산을 쏟아부은 정부는, 그것이 실책이었다는 조사가 여러 군데서 터져 나와도 정책을 합리화하는 데에만 에너지를 집중한다.
자료를 속이거나 언론에 압력을 가해 국민을 속이기도 한다.
재벌그룹 총수의 탐욕이나 오판으로 새 사업을 벌였지만 수익이 신통찮을 때, 과감하게 실수를 인정하고 그 사업에서 철수하는 대신, 총수의 선택이 오류가 아니었음을 입증할 자료들만 끌어모은다.
계열사에 피해를 줘 가며 무리한 자금 지원도 서슴지 않는다.
횡령과 배임 등 불법도 자행된다.
어느 나라라고 밝히지는 않겠지만, 그 나라에 가면 지금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 나라의 어떤 그룹 하나는, 능력이 모자라는 후계자에게 ‘성공 신화’를 만들어 주기 위해 몇 개의 새 기업을 만들어 그룹 차원에서 지원을 퍼부었지만, 결국 다 망하고 만다.
그룹과 주주들에게 금전적 손실을 초래한 것은 물론, 주변에 고루 민폐를 끼친 그 후계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룹 총수에 올랐다.
노키아, 코닥, 제록스.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기업들이었지만, 잘못된 판단을 하고, 그 판단을 합리화하느라 에너지를 다 소모한, 그래서 이제는 몰락했거나 몰락의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기업들.
(※ 아날로그 필름 제조사인 코닥은 1975년 디지털 카메라를 만들어냈다. 세계 최초. 하지만 아날로그 필름 시장의 붕괴를 우려해 디카의 출시를 억지로 늦추었고, 결국 기회는 다른 디카 업체들에게 돌아가고 만다. 코닥은 2012년 파산했다.)
개인도 이런 실수를 한다. TV를 볼 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릴 때, 게임에 빠져들 때.
잘못된 판단을 하고, 그 판단이 오류가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데 온 신경을 쏟는 것을 심리학에선 ‘비이성적 상승효과(Irrational Escalation of Commitment)’라 부른다.
마녀사냥이 꼭 그랬다.
일단 마녀라는 대상이 만들어지자, 과연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라는 성찰(省察)은 없었다.
계속 마녀를 만들어 냄으로써 마녀사냥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했다.
발놀림을 멈추면 넘어지고 마는 자전거에 오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