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엘 서울대 입성기

국영수는 핑계고 인생을 배웁니다

by 조이엘

원하고 원했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 입학했다.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났다, 기보다는 얼떨결에 입소한 기숙사. 모든 게 낯설었다.


첫 밤을 보내고 다음 날인 일요일 아침. 샤워를 하려는데 더운물도 찬물, 찬물도 찬물.


흠, 서울대도 별 수 없군.


하지만 피 끓는 청춘이 찬물인들 무서우랴. 객기(客氣)에 만용을 적당히 섞어, 끔찍한 두통을 참아 가며 그냥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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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몰랐다. 관악의 3월은 ‘시베리아’란 걸. 서울대가 있는 관악산 언저리 평균 기온은 대관령과 비슷했다. 아니 비슷했었다. 지금은 지구 온난화로 조금 상승(上昇)했을 듯.


몰랐던 것 또 하나. 일요일엔 온수(溫水)가 평소보다 몇 시간 늦게 나왔다. 다 씻고 머리까지 완벽히 말리니 나오더라. 뜨거운 물. 얼리버드(early-bird)는 빨리 죽는다더니.


서울대 기숙사에 무료-남녀-격일제-공동-목욕탕이 있‘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대에 갈 거야’라고 동기 유발(誘發)하는 친구들, 파이팅이다. 문장을 분석해 보자.


_ 있었다 : 1990년대 일이다.

_ 무료 : 입구를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_ 남녀 격일제 : 월요일은 남탕, 화요일은 여탕, 수요일은 남탕...


가끔 요일을 착각한 순진한(그렇게 믿고 싶다) 남학생이 아무 생각 없이 화요일의 목욕탕(즉, 여탕)에 당당히 들어갔다가 자신의 만행(萬行), 아니 만행(蠻行)을 깨닫고 혼비백산(魂飛魄散) 뛰쳐나오는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혼과 백은 다른 개념이지만 영어로 번역하면 둘 다 spirit.)


웃기는 건, 여탕일 때 목욕탕은 텅 비어 있었다. 이렇게 말하니 영락없는 경험담 같다. 맞다. 하지만 절대 고의(故意)는 아니었음. 나중에 알았다. 여학생들은 아는 사람이 많은 목욕탕엔 잘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동 목욕탕’의 공동(共同)이 사실은 공동(空洞 텅 비어있음)에 가깝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친구들, 뭐야, 하며 실망하지는 말기를. 대학 가면 ‘공동 목욕탕’보다 더 흥미진진한 일이 많다. (지식에 감정이 실리면 헛것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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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1학년 시절, 나(뿐만 아니라 동기들 모두)는 마치 뭐라도 된 양 뻐기고 다녔다. 교문만 바라봐도 가슴이 웅장해졌다. 머리 감을 때조차 머리를 숙이지 않던 교만(驕慢)한 시절이었다.


여러분은 명문 대학에 들어가도 절대 교만하지 말기를. 교만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처절한 대가(代價).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이다.


잊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우린 아직 ‘고딩’ 수준이라는 것을. 진정한 의미의 ‘서울대생’은 아직 아니라는 사실을.


교양 선택 과목으로 ‘서양 문화사’를 수강했다.


수업?


별로 어렵지 않았다. 한국언데 뭐.


교수님이 과제를 주셨다. 몇 권의 지정된 책 중 한 권 읽고 비평문 써 오기. 내가 고른 책은 ‘세 위계(位階) - 봉건제의 상상 세계’.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제일 만만해 보였달까.


명색(名色)이 서울대생인데 이까짓 거, 재밌게 술술 읽었다, 고 말하고 싶지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1페이지 이해하는 데 30분 넘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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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이다.


30분을 들여다봐도 이해가 안 되더라. 담론(談論), 위계(位階), 계서(階序), 세모꼴의 연대...


일단 단어에서 태클. 근데 이놈의 책이 700페이지가 넘는다. 읽는 것도 어려운데 비평까지 해 오란다. 설상가상(雪上加霜)!


내가 고른 게 원서도 아니고 분명히 번역본인데, 도대체 한글이 이해가 안 되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3개 중 하나.


1. 좌절

2. 좌절

3. 좌절


포기? 그럴 순 없지. 어떻게 들어온 대학인데.


서울대합격증.jpg


기(氣)를 쓰고 시간을 확보해, 읽었다. 당시 역곡에서 과외를 했다. 서울대에서 1시간쯤 걸린다. 마을버스 타고, 2호선 타고, 1호선 타고.


창 밖 서울 구경은 쏠쏠한 재미였지만 눈 내리깔고 그 책만 읽었다.


덕분에 이해(理解)가 잘 되었다, 라면 해피엔딩인데 역시 안 되더라. 이해도 안 되는 걸 계속 붙잡고 있자니 눈도 나빠지고 성격마저. 어쨌든 기간 안에 읽기는 다 읽었다.


리포트는?


대충 해서 냈다. 무너지는 서울대생 자존심(自尊心).


뭉크.jpg 뭉크, '절규'


나중에 알고 보니 서울대 2학년이 읽어도 어려운 책이었다.


그때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지금도 남들 가위에 눌릴 때 나는 이 책에 눌린다. 트라우마(trauma)로 남았다 보다.


1. 트라우마(의학) - 상처

2. 트라우마(심리학) - 정신적 상처


그때 많이 절망했다. 이런 게 대학이구나. 이런 게 서울대 생활이구나. 책도 이해 못 하는 내가 어떻게 대학 생활(生活)을 견딜까.


그렇게 절망의 시간들이 흘러갔다. 공부에 흥미가 떨어지고 수업을 빼먹는 횟수도 늘어났다. 기숙사에 박혀 폐인(廢人) 놀이도 참 많이 했다. 일주일간 수업을 빼먹고 침대에서 뒹군 적도 있다. 그러는 나를 한심하고 불쌍하게 본 선배가 던져 준 얄팍한 영어책 한 권.


The Problems of Philosophy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위대한 영국 철학자가 쓴 명저(名著).


!!!


철학의문제들.jpg


나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이 확 넓어지는 느낌.


고등학교 때까진 이과 공부를 했다. 물리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과학 잡지와 과학 서적도 참 많이 읽었다. 하지만 포기했다. 과학 개념(槪念)에 대한 나의 이해도는 평균 이하라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재수하면서 문과로 바꿨다. 세상에는 의욕(意欲)만 가지고는 안 되는 일도 있다.


많다.


될 일 안 될 일을 구별하는 것도 지혜다.


그날 이후 책에 빠져들었다. 처음부터 판을 넓게 잡은 건 아니었다. 하나가 알고 싶어 책을 읽으면 모르는 것 열 개가 튀어나왔다. 열 개의 모르는 것에 도전(挑戰)하고 나면 그다음은 백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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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서 문제. 10초 안에 답하기.


0.1mm 두께의 ‘얇은’ 종이가 한 장 있다. 절반을 접고, 또 절반을 접고, 이렇게 25번을 접으면 이 종이는 어떻게 될까?


실제론 25번을 접을 수 없다. 이런 걸 사고실험이라 한다. 여하튼 놀라지 마라. 종이 두께는 3,355,443.2 mm. 즉 3km가 넘는다.


종이를 접을 때처럼, 읽으면 읽을수록 나는 더 무식해져 갔다. 알면 알수록 더 모르는 역설(逆說).


철학, 종교학, 미학, 언어학, 심리학, 뇌-인지과학,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문화이론, 인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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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권, 수만 권 책들과 씨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나는 과에서 책벌레로 통했다. 아침 7시면 어김없이 도서관에 앉아 손에 책을 잡았다.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명절에 고향 가는 것도 생략했다. 서울 살면서 경복궁, 에버랜드도 한 번 안 가봤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선배들이 묻는다. 사법고시 준비하냐?


3학년이 되어 다시 그 책을 손에 들었다


‘세 위계 – 봉건제의 상상 세계’


사실, 옛날 트라우마 때문에 피해 가고 싶었다. 하지만 서양 중세사를 넓고 깊게 공부하려면 피해 갈 수 없는 책. 두려운 마음으로 첫 장을 넘기는데 어라, 그 어렵던 책이 술술 읽히는 게 아닌가!


술 취했나?


큰 어려움 없이 전체 내용을 독파(讀破)할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글까지 술술 써지는 게 아닌가. A4 한 장 채우기가 그렇게도 힘들던 리포트. 어느 순간부터 막 써지더라. 교수님들처럼 어려운 표현도 동원해 가면서.


성적도 저절로 나오더라. 1학년 땐 F도 받고 D-도 하나 있었는데 3, 4학년 땐 부분 장학금도 받을 정도로 공부가 쉬어졌다. 전체 장학금은 왜 못 받았니, 라면 할 말이 없다. 그건 내 능력 밖이더라.


그때 깨달았다.


인문 독해력이 생기면 공부가 쉬워진다는 사실을. 인문 독해력은 고급 문해력이라 불러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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