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꿀 Feb 14. 2020

[개꿀너꿀 라이프](8) 나의 꿈 변천기

'차라리 육체노동하며 글만 쓰고 싶다'는 바람에 대해


나는 동화작가이자 워킹맘이다. 이것이 서른 일곱 살, 나의 정체성이다.


내가 작가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건 27살 무렵.(벌써 10년이 흘렀다) 그 전에는 어렴풋이 막연한 바람 정도만 가졌을 뿐이다.


20대 초중반, K선배가 내 글을 보더니 "동화를 쓰면 잘 쓰겠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갓 대학을 졸업한 때였다. 진로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었기에 그 말이 유독 크게 와닿았다.


당시 나는 기자가 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대학에서도 학보사 기자로 3년 간 격주로 신문을 만들었고, 이런저런 객원기자, 사보 기자 등으로 일하며 고료를 받는 생활을 했다.


학보사 생활을 마치고 23살 무렵에 학과 추천으로 지역 방송국에 방송작가로 일했다. 주 1회 방송이 방영되면 원고료가 들어오는 프리랜서 생활이었는데도 너무나 즐거워서 1년 휴학 하고 2년 간 일했다. 섭외, 원고작성, 현장진행(FD)까지 그저 닥치는대로 일해야 했지만 적성에 맞는다 여겼다(돌이켜보면 열정페이였다.).


'실버 프로그램' 작가로 들어갔는데 다행히 방송이 종영되기까지 한 번도 펑크내지 않았다.(다른 분들이 펑크내지 않았기도 했고.) 이후에는 '의학 프로그램' 등 다양한 프로를 담당했다. 그렇지만 작가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곳이었기에 미래를 그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시절의 나는 젊었고 학교를 졸업해야 했기에 일을 관뒀다.


'시인'이 꿈이던 문학소녀


어릴 적엔 '문학소녀'가 꿈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은 내가 쓴 일기를 친구들에게 읽어주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명백한 '사생활 침해'겠지 당시에는 선생님의 Pick을 받아 내 일기가 읽히는 상황이 신기하고 수줍고 기뻤다. 초등 5학년 때 전학을 갔는데 거기서도 선생님이 종례시간마다 내 일기를 아이들에게 읽어주곤 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우리집은 넉넉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쉬지 않고 해야 했고, 나와 언니 오빠 동생은(그렇다, 4형제다) 알아서 커야만 했다. 아침에 알람 소리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밥을 먹고 등교를 하는 일상. 그 과정에는 부모의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언니가 오빠를, 오빠가 나를, 내가 동생을 챙겨서 가능했으리라.


나는 국민학교로 입학해 초등학교를 졸업다. 당시에는 '촌지 문화'가 있었기에(선생님께 현금봉투 등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나쁜짓) 나는 그다지 선생님이 눈여겨 둘학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나의 재능을 발견한 건 4학년 담임 박영숙 선생님이셨다. '방과후학교'라는 개념 없던 당시에, 수업을 마치면 교실에 남게 해 글쓰기 지도를 해주다. 그렇게 다듬은 글을 한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 제출했고, 가장 큰 상을 다.


시상식이었던 토요일 아침, 텅빈 운동장 팽나무 아래 엄마랑 선생님을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아담한 선생님의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갔던 기억. 한 신문사의 회의실에서 5,6학년 언니들을 제치고 1등상을 받아 뿌듯했던 기억. 어찌나 기쁘고 들떴는지 엄마가 예뻐 보였다.(선생님은 첫 대면에 "개꿀이 어머님 이쁘시네요" 했지만 장사하느라 볕에 그을린 엄마가 원피스를 입고 화장을 한 모습이 내눈엔 몹시 이상했다. 아마 엄마답지 않다고 여겼을 거다. 날씬한 몸매가 드러나는 근사한 원피스였는데, 왜 사진 하나 남기지 않았을까.)


당시 상품으로 꽤 액수가 많았던 5만원권 도서상품권을 받았고 시내의 큰 서점에서 사촌동생에게 줄 책과 내 책을 듬뿍 사면서 어렴풋 시인이 되겠단 꿈을 가졌다.


시상식을 마치고 되돌아오는 버스에서 "엄마, 나 시인이 될래요"했을 때 엄마의 반응은 어땠을까? 아마도 격려를 해주신 것 같다.

 


'영화잡지기자'를 꿈꾸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것도 '영화잡지기자'. 미래 직업 희망을 적는 조사서에도 그냥 기자가 아니라 꼭 '영화잡지기자'라는 여섯 글자를 적곤 했다.(영화전문기자라고 적었으면 멋있었을텐데.) 그때, 나는 한창 '스크린'이라는 월간 잡지에 빠져 있었다.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내가 동경하던 한 친구 때문이었다. 지금은 사이가 데면데면하지만, 당시에 나는 그 친구를 무척 좋아했다. 하얀 피부에 질끈 머리를 하나로 묶고 조용한 말수에, 쉬는 시간엔 차분히 책을 보던 그 친구. 공부를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늘 성적이 잘 나오던 똑똑한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를 동경했다. 그래서 친구의 취미활동인 '영화'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가끔 친구랑 쪽지를 주고 받았는데, 쪽지 말미에 친구는 늘 '한사애: 한국 영화 사랑은 애국입니다'라는 글을 적어놓곤 했다.


그게 멋있어서, 나도 '한사애' 하고 싶어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보았고, 영화에 매료됐다. 그리고 시네키드의 수순이 그러하듯이 용돈을 아껴 영화 전문지를 사서 기사 하나 하나 꼼꼼히 읽고, 방학 때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 영화를 감상하곤 했다. 나중에는 그 친구보다 더한 '영화광'이 되었으니 얼마나 영화를 사랑했는지 알만하다.


'영화기자'가 되려면 연극영화과 같은 데를 가야만 한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한없이 성적이 모자랐고, 결국 '언론홍보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학보사에서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며 기사를 썼고, '영화잡지'를 뺀 그냥 '기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한 인터넷 언론사 인턴기자로 뽑혀 친인척 하나 없는 서울에서 언론사 출퇴근하는 생활을 했다. 직접 경험한 언론사 기자 생활은 참 팍팍하고 치열했다.


그때 깨달았다. 빨리 빨리 아이템을 발굴해 빨리 빨리 기사를 써 올리는 게 나에겐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걸. 그래도 어찌어찌 수료했고, 나는 기자가 아닌 홍보마케터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때 어렴풋 마음 속에서 '기자'라는 꿈을 지워버린 것 같다.


K선배가 나에게 '동화작가'가 어울린다고 말했던 시기가 이때다. 그는 내 문장이 동화답다 했다. 동화적 문장이라는 게 뭘까? 궁금했지만 알아볼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동화책 하면 떠오르는 건 '안데르센의 동화'였다. 이솝우화 같은 것들.

당시에는 웃어 넘겼지만 오래 오래 '동화작가'란 단어가 마음에 남은 것은, 나를 등떠미는 질책의 언어들 속에서 나를 인정하는 빛나는 단어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초년생인 나는 '끈기'가 매우 없었다. 한 직장에서 오래 버티질 못했다.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메뚜기'를 열심히 뛰었다. 적성이 맞지 않아서, 상사가 이상해서, 월급이 아서, 막 부려 먹어서 등등 이직을 합리화한 이유는 다양했지만 어쨌건 옮길수록 그곳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 탄탄한 직장으로 옮긴 덕분이기도 하고, 마음이 더욱 야물었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먹고 살기 위해 다녔던 직장은 달랐지만 하는 일의 범주는 비슷했다. 바로 '글'을 기반으로 했다는 것. 홍보마케터, 기자 사이를 오갔으니 '글쓰기' '작문실력'은 필수였고, 보도자료나 기사 같은 글을 거의 매일 쓰면서 알게 모르게 '글쓰기의 근육'을 다져 나갔다.


한 협회에서 신문을 만드는 일을 했을 때, 급여가 올랐고 난생 처음 '여유'라는 게 생겼다. 물론, 어디나 그렇듯 유별난 상사가 있었지만 일은 적성에 맞았기에 인정 받으며 일

재밌게 일했다. 또, 퇴근 후에 무언가를 배울 의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선택한 것은 글, 글, 글. 육하원칙을 사실로 한 역 미라미드 형식의 기사글이 아닌 창작을 하고 싶었다.


이런 저런 취미 글쓰기 활동을 거쳐 마지막으로 정착한 게 '동화작가교실'이란 곳이었고, 그곳에서 1~2년 간 치열하게 동화와 연애했다. 1년 동안 책 300여권을 읽을만큼 동화에 심취해 있었다. 옛날 그 남자친구의 눈이 정확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나는 동화가 무척 재밌었다.


동화는 어른인 내가 '어린애들이나 읽는 유치한 책이겠지' 하고 넘길만한 텍스트가 전혀 아니었다. 동화를 통해 어린시절의 나를 마주했다. 아프고 상처 받는 내가 서 있었다. 나는 어린 개꿀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동화를 한 편, 한 편 지을 때마다 유년기의 상처가 아물며 조금씩 건강한 사람으로 변해갔다.


당시 나의 큰 고민은 오로지 하나였다. '동화'에 올인하고 싶다는 것. 매주 신문을 만들고 있었기에 아침이고 점심이고 취재를 다녀와서 '기사'를 써야했다.


"이런 딱딱한 글을 쓰니까 창작이 안 되지."

이런 생각을 하니 기자 일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현실이 매우 갑갑했다. 딱딱한 기사체가 창작을 방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당장 관두기엔 월세도 내야했고, 생활비도 벌어야 했다. 어쨌든 돈은 벌어야겠고 어렴풋 '육체노동'을 업으로 삼고 나머지 시간에 글을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꽤 오래 갈등 했다.(지금 생각해보면 건방지고 철없는 생각이었다.)


지금도 네이버 지식인이나 각종 고민 상담 채널을 보면 종종 이런 질문이 올라온다.


'작가가 되고 싶은데, 회사 관두고 글만 쓸까 봐요(글 쓸 시간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기사나 에세이나 이런 것 말고 자신이 원하는 소설이든 동화든 '창작 글'만 적으며 살고 싶단 뜻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단호히 말해주고 싶다. '아니오'라고.


지금도 수많은 작가들이 업과 창작을 병행하고 있다. 우리나라 출판시장이 작가에게 유리하지 않다. 인세는 턱업이 작고, 책 소비량은 점점 줄어든다. 책을 펴내서 끼니를 해결하는 작가들은 몇이 되지 않는다.


오늘을 살아나가는 건 숭고한 일이다. 밥벌이는 매우 중요하다. 내가 인간으로 버티고 살 수 있는 힘이 된다. 어떤 일이든 반드시 놓지 말고 쥐고 있기를 권하고 싶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절대 잊어버리지 말라. 그러면 된다.


작가가 되겠노라 단호하게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내가 무슨 일로 밥벌이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하루 일과 중에 창작의 시간을 반드시 갖는 것이다. 퇴근 후 혹은 주말에 집중적으로 글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놓지 않고 쓴다는 것. 지금 글을 쓰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작가다.


부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작가가 되길 바란다. 계속 글을 쓰다보면 언젠가 결론을 내야할 때가 온다. 그때 '전업작가'를 선택해도 늦지 않다. 설령 전업작가가 되었다가 다시 또 직장으로 돌아간다고 '패배'한 것은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밥벌이는 무척 중요하므로.


그리고 지금 글을 쓰는 걸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운이 좋네요."


매일 무언가를 쓴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작가라는 꿈에 가까워진다. 딱딱한 기사체든, 보고서든, 상품 안내책자든 당신이 쓴 문장이 창작의 문장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허투루 보내지 마라. 실제로 나 역시 매일 매일 글을 쓰는 '루틴'이 몸에 익어 글을 쓰는 게 두렵지 않게 됐다.(좋은 글을 쓰는 건 그 다음 단계)


만약 회사에서 글과 전혀 관계 없는 일로 세월을 낭비하는 것 같아 괴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도 운이 좋네요."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경험'이다. 체화한 경험은 책이나 영화를 통해 접한 '간접체험'과는 도 자체가 다르다. 아직은 그 경험들이 객관화가 되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 지루할 수도 있고, 고될 수도 있다. 그럴 땐 자신의 삶을 드라마 속 주인공 보듯 떨어져서 바라봐라. 좀 재밌지 않은가? 와, 저런 이야기를 드라마에 담으면 재밌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삶을 전혀 낭비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가 힘들다면? 그런 분들은 하루를 살아내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길 바란다. 반드시 고난은 지나가고, 그 경험은 당신의 자산이 될테니까. 작가를 꿈꾸고 있다면,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시간은 돈으로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시간이다. 내가 장담한다.


그러니 우리, 부디 오늘을 꿋꿋하게 살아나가자. 작가를 꿈꾸는 너에게, 작가로 살아가는 나에게 바치는 글.


* 다음에는 직장생활하며 작가로서 훈련하는 방법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마음 내킬 때 주제를 정해 글을 쓰기 때문에 '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잘 모릅니다. 정말 하고싶은 말이 많군요. 아아! 나는 TMI 였던 것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개꿀너꿀 라이프](7) 엄마의 잔머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