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꿀 Jul 12. 2021

이제 날 위해서도 촛불을 들 것이다

[은유카드]촛불, 보물


오늘의 단어

사람들은 저마다 보물을 품고 있다. 아프고 힘든 누군가를 위해, 불합리한 세상을 향해 촛불 들었던 그 마음이 보물은 아니었을까.




'촛불'이라는 단어를 마주하면 자연스레 촛불 시위가 떠오른다. 다른 기억을 찾아보려 해도 결국 제자리다.


몸에 새겨진 경험은 힘이 세다. 마음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내 떠오르고 만다.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시청 광장으로 출석했던 시간들. 구호는 희미해졌지만 절망 속에서 입을 모아 희망을 외치던 그 순간만큼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새삼스레 그날의 일들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은유 훈련'은 자신을 들여다보기 위해 시작한 거니까. 그러니까 '촛불 시위'가 아니라 그 당시의 내가 어땠는지 써야만 한다. 남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나만의 이야기를.




피부과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멍하니 TV를 봤다. 별안간 1년 전 퇴임한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속보가 떴다. 눈을 비볐는데도 여전했다.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인가, 아니면 내가 다친 곳이 얼굴이 아닌 머리인가 여러 번 의심했다. 그러나 옆 사람들의 벙진 얼굴과 수런대는 말소리를  보아하 사실이었다.


그날 내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고, 얼마나 오랫동안 슬펐는지는 쓰지 않겠다. 어떻게 써도 진부할 뿐이니까. 다만 당시의 내 이야기를 써야겠다.


"뉴스 봤어요? 노대통령님 돌아가셨대요..."

하룻밤 신세를 진,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언니가 문자를 보내왔다. 답장을 쓰려는데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의사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여기서는 치료가 안 된다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다. 아니, 얼굴이 다쳤는데 피부과에서 치료가 안 된다니. 지금 생각해보니 귀찮아서 그런 것 같다. 단순 드레싱은 큰 돈이 안 될테니까. '말 잘듣는'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의심 없이 의사가 시키는대로 냉큼 다른 병원으로 갔다.

근처 종합병원에서 간단한 치료를 마치고 광대뼈에 커다란 밴드를 붙여 길을 나섰다. 밴드는 누가 보더라도 눈에 띄는 크기였다. 숙취가 채 가시지 않아서인지, 충격적인 소식 탓이었는지 속이 좋지 않았다. 빨리 집에 가서 푹 쉬고 싶었지만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집에 가려면 지하철을 타고 사당역까지 가서 광역 버스로 갈아타 했으니까(당시 경기도에 살았다).



내가 얼굴은 다친 곳은 흑석동의 한 편의점 앞이었다. 당시 '영화 마케터 양성 교육'을 수강하고 있었는데, 매주 한 번씩 수업을 들으러 중앙대로 갔다.


그 날은 마지막 수업이라 송별회를 열었다. 아마 편의점은 적어도 3차 자리였을 것이다. 악으로 깡으로 술을 먹던 때였다. 20대 반, 그야말로 젊었으니까.


맥주를 마시다 깜빡 졸았는데 눈을 떠보니 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여긴 어디? 난 누구?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자리에 앉았다. 마저 캔맥주를 마시는데 날보는 사람들 눈이 심상치 않았다.


"피...얼굴에 피피!!!"


그제야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거울로 살폈더니 얼굴이 엉망이었다. 바닥에 넘어지면서 아스팔트에 얼굴을 쭉 긁힌 것이다. 그것도 인정사정없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내 물음에 동석자들이 답하길, 내가 갑자기 픽 고꾸러지더니 넘어진 속도보다 더 빠르게 일어났다는 것이다. 얼굴에 피칠을 하고. 


그러니까 나는 잠을 잔 거였다. 자리를 뜰 타이밍을 놓치고 막차가 끊길 때까지 술만 마시다 깜빡 졸았고 그대로 고꾸러진 거다.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겠지만 그보다 더한 일도 있었던, 내 나이 20대였다.


그날 나는 조장 언니네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알고보니  집은 언니네 오빠 부부와 어린 조카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그러니까 언니가 얹혀 사는 집에 혹 하나가 딸려간 상황.


다음 날, 조장 언니네 새언니가 차려준 해장국까지 먹고 을 나섰다. 아아, 대체 나는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이었나. 누가보면 눈치도 염치도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나는 너무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이냐고?



사회 초년생 시절, 내가 가장 헷갈리고 어려웠던 건 '맺고 끊는 것'이었다.


'거절 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은데?'

 

누군가가 뭔가를 제안하거나 하자고 권유하면 마지못해 따른적이 많았다. 내 마음이 편치 않거나, 혹은 빠지는 게 맞는 것 같을 때도 '내 생각이 맞는 걸까?' 의심하며 늘 타이밍을 놓치곤 했다.


이 날도 아침밥을 먹고 가라는 권유에, 내 마음은 더이상 민폐를 끼치지 말고 어서 빨리 집으로 가자고 이야기했지만, 거절하는 게 더 실례일까 싶어 쭈뼛거리다 결국 밥 한그릇을 다 비우고 나왔다.


솔직히 언니의 가족들이 날 불편히 여겼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건 그들의  마음 영역이다. 거기까지는 나의 몫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의 진위를, 마음을 파악하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밥을 먹고 가라던 그 마음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내 마음에 따라 결정하면 되는 걸 혼자서 끙끙대면서 밥을 먹은 거다.


'밥을 먹었다'는 결과는 바뀌지 않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사서 피곤을 자처하는 걸까. 고백하건대 10년이 지나도록, 나는 이런 피곤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여전히 대인관계나 의사결정의 순간에 '남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보는 것이다. 그 누구도 뭐라하지 않는데 말이다.



시간이 흘렀고 얼굴의 흉터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상처 부위가 제법 깊고 커서, 과연 나을지 걱정됐는데 시간이 지나며 새 살이 돋았다. 하지만 관계에서 내 감정을 '을'로 놓고 보는 습관은 낫지 않았다.


나를 알고 싶었다. 아이를 둘이나 낳고 보니 내 속이 제일 궁금했다. 몇 달 전, 좋은 기회가 생겨 정신과 심리 상담을 받았다. 10 여회의 상담을 통해 내 자신에 대해 내밀히 알게 되었는데, 오늘날 내가 껴안고 있는 문제의 패턴은 어린시절의 결핍이나 상처와 맞닿아 있었다.


나는 어릴 적, 어른들의 피드백을 제때 받지 못하는 아이였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외로움인지 슬픔인지 분노인지 알지 못했다. 내 행동이나 상대의 말에, 어른들은 왜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이게 반복되다보니  결국, 원인을 내 자신에게서 찾았다. 눈치 없는, 미숙한, 바보 같은 내가 문제였다는 식으로.


그건 간편했지만 몹시도 아픈 일이었다. 행여 내가 뭔가를 실수해서 저들에게 미움 받지는 않을지, 내가 원만한 관계를 망치지는 않을지 조마조마했다. 그렇다고 결과가 최고였던 것도 아닌데 나는 매순간 정답을 찾으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10여 차례 상담동안 여러번 내 자신과 마주했다.점점 마음이 편안해지고 진짜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상처 받은 작은 아이였다. 나는 그 아이를 꼭 껴안아주었다.


내 마음을 이제 알아주는구나?
오랫동안 기다렸어.


작은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아이의 미소를 본다.



요즘은 그 누구의 마음보다도 내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려 노력하고 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둠속에 가려진 진짜 나의 욕망은 무엇인지. 대의를 위해 촛불을 들기 보단 내 자신을 위해 불을 밝히는 셈이다.


그러자 내가 보였다. 외로워서 울고 있는 어린아이, 거절하지 못해 술을 마시며 내 자신 챙기는 걸 소홀히 했던 대책없던 20대 청년. 지금의 나를 만든 과거의 내가 불빛 속에서 얼굴을 밝히고 있다.


모든 얼굴이 지금의 나와 다르지 않음을 이제 인정하자 비로소, 내가 또렷해진 거다.


신기하게도 나를 중심에 놓자 상대의 말에 감정을 덜 쓰게 됐다. 저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진위를 따지려 힘쓰지 않는다. 그저 감사한 말은 고맙게 받아들이고 불쾌한 말은 언짢게 받아들인다. 상대가 미안하다 사과를 하면 그 역시 그대로 받는다. 쉽지는 않지만 연습을 했더니 많이 좋아졌다.


앞으로도 촛불로 내 마음 밝히기를 소홀히 하지 않으려고 한다. 어둠을 빛으로 밝혀 '나'라는 보물을 찾을 참이다. 평생동안, 꾸준히. (*)


매거진의 이전글 4살 딸의 손에 매니큐어를 바르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