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여성의 아름다움, 어쩌라고?
다음 문장을 읽고 느껴지는 감정을 서술하시오.
“여자는 예뻐야 한다.”
다음 문장은 어떻습니까?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 “사람은 근면 성실해야 한다.”
맨 위의 문장은 시대착오적이고 성차별적이며 소양이 부족한 사람이나 입 밖으로 낼 법한 말처럼 들린다. 한편 아래의 두 문장은 인생의 진리 같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윗 문장보다 아랫 문장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돈, 시간, 노력을 들여 애쓰며 살아왔을까? 솔직히 나는 하루 중 거울을 보는 횟수만큼 나 자신의 겸손함과 근면함에 대해 반성하며 살아왔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오히려 사람들은 예쁜 여자가 겸손하지 않으면 성격까지 통통 튀는 매력이 있다고 칭찬했고, 근면성실은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들이 대신해 줄 것이라고 했다.
여성들이 돈과 시간, 그리고 노력을 “여자는 예뻐야 한다”를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이 쏟아붓는 것이 많은 부작용을 낳아 사회문제가 된 것은 오래된 일이다. 가끔 법보다 주먹이 가깝게 느껴지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오만이나 불성실보다는 눈에 바로 보이는 부족한 외모가 여성들에게 더 즉각적인 아픔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살면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무기들, 예를 들어 외모, 인격, 재산, 학벌, 집안 등 중 가장 향상하기 위해 손대기 쉬운 것이 외모이다. 부모님을 바꾸는 것보다는 눈의 크기와 코의 높이를 바꾸기 위해 수술대에 눕는 것이 더 쉽다. 무엇보다도 일단 외모가 훌륭하면 인격이 좀 부족해도 쉽게 용서받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살다가 여러 가지 일이 내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 “우선 살이나 좀 빼볼까..”라는 생각에 빠지기 쉽다.
그런데, 30대가 되니 갑자기 룰이 바뀌었다. 지루한 외모 평가의 감옥 속에서 20대를 지냈는데, 30대가 되자 이번엔 갑자기 외모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달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능력과 성숙한 인품을 요구받는다. 하지만 능력을 더 보겠다고 해서 외모에 대한 평가에서 해방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30대라서 20대만큼 예쁠 수는 없는데 너무 폭삭 늙어 여성성을 잃지는 마라.”라는 사회가 주는 무언의 압박. 이것은 “너는 외모 평가에서 해방되었다”라는 말이 아니다. 즉 서른이 넘어도 ‘얼평’, ‘몸평’은 계속된다. 평가 항목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다. “어려 보일 것.” 그러면서도 “주책은 떨지 마세요.”
나는 이 지점에서 혼란스럽다. 우선 30대가 되니 예쁘다는 말에 항상 토가 달린다. “예쁘긴 한데 20대와는 게임이 안 되지.” 그 말에 상처 받아 이런저런 시술을 받으면 “곱게 나이 들지 않고 발악한다.” 나이 듦을 받아들여 가만히 두면 “아줌마 다 됐네. 자기 관리 좀 해라.” 유일한 방법은 나이를 먹어도 얼굴은 나이 들지 않는 기적을 바라는 것이다. 나는 가끔 “태어난 지 30년이 훨씬 지났는데 아직 안 죽고 살아있으면 눈치껏 웃으며 주제 파악해야 하나?”하고 싶어서 화가 난다.
게다가 30대가 되니 이제 외모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눈에 보여 더 이상 외모에 매달리며 다른 것들을 등한시하고 싶지 않아 졌다. 대표적으로 건강과 내 경력, 인간관계가 내게 너무 중요해졌다. 어느 날 평소에도 즐겨 먹던 새우를 먹었는데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놀라서 병원에 갔더니, 없던 알레르기가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나이가 들면서 서서히 면역력이 낮아져서 나타난 것이라고, 앞으로 어떤 알레르기가 새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30년 넘게 내 몸의 무게를 버텨주던 발바닥이 비명을 질렀다. 족저근막염이었다.
일에 관련해서도 전보다 예민해졌다. 무엇이든 시작해도 늦지 않았던 시기가 지나가고 있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벌써 대기업 신입으로 들어가기엔 늦은 지 꽤 되었고, 이제는 내가 어떤 분야에서 경력을 쌓고 싶은지 결정해야 하는 마지노선에 다가가고 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영부영 유지되던 관계들이 그들이 결혼과 함께 정리되거나 더 끈끈해지고 있다. 동성 친구를 결혼 전까지 시간을 때워주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생각했던 “남미새”들이 결혼과 동시에 연락이 뜸해졌다. 이제 내게 남은 친구, 혹은 이제 새로 만나는 친구들은 나의 외적 조건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친구들이다. 나는 이들이 중요하게 느껴져서 내 집중을 좀 더 이들에게 쏟고 싶어졌다.
외모 문제는 종종 사회를 비틀어 놓는다
피부에 트러블이 심해져서 피부과에 갔더니 상담 실장이라는 분이 혹시 예뻐 보여야 할 일이 있냐고 내게 물었다. 일주일 후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던 것이 생각나 말씀드렸더니 “친구가 오랜만에 혜우 씨를 딱 봤을 때 “어머, 얘 왜 이렇게 이뻐? 어쩜 이렇게 어려 보여?” 싶어야 얘가 잘 살고 있구나 생각하고 부러워해요.” 하면서 120만 원짜리 피부 관리 프로그램을 권했다. 내 친구들 중 나를 피부 상태로 평가할 친구는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에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마케팅의 일환이니 웃으며 넘어갔다. 만약 저 영업용 멘트가 효과가 있어서 사용하는 것이라면 참 씁쓸할 것 같다. 듣는 사람이 상처를 많이 받아 약해져 있을수록 저런 말도 안 되는 말도 먹히기 쉬워진다.
모든 집착이 그렇듯 외모에 대한 집착은 사람이 취약해져 있는 사이 그의 인지를 왜곡시켜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나는 이 문제로 몇 달 전, 오랜 친구가 싫어졌다. 대학 후배인 그 친구는 외모에 관심은 많지만 객관적으로는 많이 아쉬운 외모를 가졌다. 필시 외모가 중요했던 20대 내내 외모 칭찬에 대한 굶주림이 있었을 테다. 하루 종일 머리에 신경을 쓰며 만지는 사람에겐 한 마디라도 머리 예쁘다는 말을 하게 되듯이, 모두가 20대 때보다는 외모에 덜 신경 쓰는 나이에도 한껏 꾸미고 나와 온몸으로 “나 예쁘지?”를 묻는 그녀에게 주변 사람들은 예쁘다는 인사말을 건네곤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굶주렸던 칭찬이 허겁지겁 채워진 그 친구의 가치관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평소처럼 통화를 하다가 그 친구가 갑자기 말했다.
“세상에서 외모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 세상이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그것보다 중요한 건 없는 게 느껴져. 외모가 부족한 사람들은 왜 자기를 그냥 두고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예뻐야지.”
이미 예쁨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말투.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쏟아졌다. 무슨 개소리를 저렇게 오랜 숙고 끝에 얻은 통찰처럼 말하나? 혹시 저게 저 애의 최선의 사고인가? 내가 알던 그 친구 맞나?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나? 아이돌 연습생도 아니고 저게 32살 회사원 입에서 나올 소린가? 다들 마스크 쓰고 일자리를 잃는 코로나 경제난 속에 세상이 점점 외모가 제일 중요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니? 쟤가 머리가 있는 애인가? 안 예쁘고 안 잘생긴 사람들을 보면서 저런 생각을 한다고?
학벌이 지성의 증거는 아니지만 저 친구도 좋은 학교를 나왔고 지적인 능력이 필수적인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어릴 땐 정신 나간 소리를 해도 어느 정도 용서받는다. 하지만 서른이 넘어하는 정신 나간 소리는 그 사람의 인격으로 간주된다. 나는 그 통화를 끝내고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며, 그런데 왜 저렇게 안 좋은 쪽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인간의 한계를 원망했다. 나는 친구의 사고방식이 유치한 쪽으로 망가지는 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 저런 게 노망이구나, 하고 나는 그 친구에 대한 기대를 거둬버렸다.
모두가 저렇게 이상한 결론을 얻고 실망스러운 상태로 귀결되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누구도 말처럼 외모에 구김살 없이 쿨하기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크고 작은 콤플렉스와 인정 욕구, 포기, 자책, 비교, 식이장애 등으로 얼룩진 우리들의 자아상과 타인을 보는 가치관. 노화되어가는 몸을 이끌고 이제는 여기다 30대 다운 성숙한 관점까지 갖추어야 한다.
내가 30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결혼한 여자가 남편의 가계에 속하게 되는 호주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듯 외모를 향한 여자의 처절한 노력을 숙명처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이 보여서 포기할 수 없다. 요즘 어린이들은 친구가 식판을 엎지르거나 넘어져서 대자로 뻗는 것처럼 부끄러운 실수를 하면 뒤에서 키득키득 웃으며 구경하지 않는다. 우르르 달려가서 수습을 도우며 “괜찮아, 그럴 수 있어. 괜찮아.”하며 열심히 친구의 자존감 지킴이 노릇을 한다고 한다.
나는 그것이 80년대생 부모가 세상을 약간 더 좋은 곳으로 바꾼 것이라고 생각해서 얼굴도 모르는 언니들이 기특하고 자랑스럽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고 급진적으로 바뀌지 않나? 외모의 기준도 바뀔 수 있다. 타인에 대한 관음과 평가가 인간의 본능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외모의 기준이라도 말이 되는 쪽으로 그런 의미에서 나는 2021년 도쿄 올림픽의 여자배구와 댄스 예능프로그램인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가 반갑다.
도쿄 올림픽의 여자 배구 세르비아전에서, 나는 가느다랗지 않은 여자의 팔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부끄럽게도 내 나이 34살이었다. 공을 칠 때마다 근육이 도드라져 보이는 탄탄한 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연약한 몸이 아닌 힘세고 탄력 있는 몸이 자신의 기량을 펼쳐 보이는 경쟁의 장이 경이로워 나는 소리를 지르며 볼 수밖에 없었다. 비록 한국 국가대표팀은 졌지만 나는 이미 여자배구팀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승패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경기를 보고 난 후 나는 팔에 근육을 만들고 싶어서 팔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도 나의 몸을 긍정하게 해 준 프로그램이다. 나는 하체에 비해 상체가 발달한 스타일이라 말라 보이기 어려운 몸을 가졌다. 팔뚝에 어깨에 가슴까지. 나는 유독 상체에 살이 안 찌는, 앉아있으면 날씬해 보이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런데 ‘스우파’를 보니 상체가 발달한 사람이 춤을 추면 훨씬 현란해 보여서 댄스 배틀에서 유리했다. 그래서 중요한 배틀을 앞둔 어떤 크루의 리더가 팀원들에게 “상체를 많이 쓸 것”을 요구했다.
어차피 댄서가 될 것도 아닌데 이 말이 왜 그렇게 위로가 되었을까? 평생 미워만 했던 나의 상체가 지금 여기가 아니더라도 어디에선가 쓸모가 있다는 것이 기뻤다. 게다가 이제 나도 사회의 시선이 마냥 두려워 쩔쩔맸던 20대가 아니다. 내 몸은 타인의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나 자체의 큰 일부이고, 버리거나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나의 고유한 것이라는 자각이 어느샌가 생겼다. 그래서 내 몸을 긍정할 수 있을 근거를 나도 모르게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여자 배구 선수들과 여성 댄서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얼마 전부터 킥복싱 도장에 다니고 있다. 상담을 받으러 갔더니 관장님이 운동 목적을 물으시며, “다이어트하고 싶은 거죠?” 하셨다. 나는 대답했다. “아니요. 만능 스포츠 우먼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나쁜 놈을 마주치면 두들겨 패고 싶다. 굳건한 몸으로 날아다니고 싶다. 누군가가 “더 이상 예쁠 수 없는 나이 들어가는 여자”라고 후려치면 더 세게 받아쳐 버리고 싶다. 평가의 대상으로서 쇼윈도에 걸려있는 나를 한 손으로 들고 나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