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발병 초기 3개월 투병기
나의 서른한 살은 죽음과 함께 왔다. 2월 어느 날 밤, 길을 걷던 나는 문득 내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울증 발병 2개월 차였다.
첫 한 달 동안엔 엄마 때문에 죽는 게 녹록지 않았다. 나는 영화 속의 우울증 환자처럼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도 괴로워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하루에 한 번, 외투를 입혀 산책을 데리고 나갔다.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리면 오열을 했다. 내겐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갈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우울증의 증상은 네 가지 중 하나로 온다. 거식불면, 거식과수면, 과식불면, 과식과수면. 나는 그중 거식과수면의 양상을 보였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계속 자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고 싶었다. 하지만 자꾸 깨워서 밥을 먹이는 부모님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건강한 음식을 먹고 조금이라도 움직여야 낫는 병인데, 나는 나을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거부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서울에 집을 가지고 있었다면 우울증을 그렇게 심하게 앓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병상에 누운 내가 나를 적극적으로 포기한 것은 내가 다시 서울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 때문이었다. 나는 스무 살 때 서울에 올라와서야 비로소 살기 시작했다. 뒤집어서 보면 내가 스무 살 이전의 광주에서의 삶을 ‘탄생 이전’, 즉 삶이 아닌 상태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기대를 많이 받고 자란 광역시 소시민 부부의 모범생 장녀. 나는 여기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정형화된 캐릭터는 행복하거나 불행하기 어렵다. 그저 역할을 해내는 것이다.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나는 종종 정자 난자 뽑기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뽑혀 우리 집 큰 딸로 태어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엄마 아빠는 그 애도 사랑했겠지. 그 애도 나랑 똑같이 살았겠지. 나는 자아가 아니라 위치로서 존재하는 것 같았다.
멀쩡한 사람의 삶이란 이렇게 부모의 뜻을 따르며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 것인 줄 알았다. 고등학교 3년 간 명절에도 크리스마스에도 하루도 빼지 않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인 줄 알았다. 나도 친구도 꿈도 사랑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면 밤이 되어 잠을 잤다. 내가 정말 살아있었는가?
서울로 대학을 가게 돼서 부모님과 떨어지고 나서야 “태어났으니 사는 삶”에서 벗어났다. 내게 서울이란 자유의지였다. 따라서 나는 광주에서의 주체적인 삶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했다. 어떻게 광주에서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앞으로 내 삶엔 행복이란 없는 것인가?
그런 미래라면 없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명백하게 실패한 나를 받아줄 만큼 서울은 너그러운 곳은 아니었다. 일어나서 샤워를 할 힘도 없었던 나는 그 치열한 곳에서 맨주먹으로 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병에 의해 무작정 죽음을 생각했었는데 갈수록 이성적으로 계산을 해 보아도 내가 살 길이 없어 보였다. 아, 사람이 이럴 때 죽는구나. 나는 이번 생이 끝났다는 결론을 냈다. 그럼에도 목숨이 저절로 끊어지지 않음이 고통스러웠다.
그 와중에 약은 제 일을 한 건지 서서히 기력이 생겼다. 낮에는 낫는 방법을 연구하고 밤에는 죽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러던 중 ‘그것이 알고 싶다’의 ‘자살 유가족 편’을 보게 되었다. 가족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남겨진 가족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였다. 나는 그 편을 다 본 후 인터넷 드라마 게시판에 익명으로 글을 남겼다. “나 우울증 환잔데 안 죽기로 결심했어.” 모르는 사람 7명이 댓글을 달았다. “잘 생각했어. 좋은 날이 올 거야.”
3개월 차가 되니 노력하면 낮에 밖에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 또한 약 덕분일 것이다. 그때 나의 낙향 소식을 들은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만나자는 연락을 하셨다. 또 눈물을 한 바가지 흘리며 샤워를 하고 한 시간에 걸쳐 옷을 입고 공원으로 갔다. 퇴직 후 영어학원 안에서 조그맣게 국어반을 운영하셨던 선생님은 나를 위해 일자리를 만들어주셨다.
힘들어요, 못해요.라고 했지만 재차 권하셨다. 제자를 살리려는 스승의 사명감이었다. 이를 엄마에게 말했더니 매우 기뻐하셨다. 모범생 장녀는 그 두 분의 말을 거역하는 법을 몰라서 그 몸을 이끌고 출근을 하게 되었다. 내가 그 일을 하고 싶은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모든 것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력을 짜내서 하루에 한 시간 수업을 하고 23시간을 울면서 몸을 쉬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힘들어서 운 것이었다.
터질 듯한 신체 에너지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듯한 예비 고1 남학생들을 맡게 되었다. 젊은 여선생 앞에서 자기가 학생인지 남자인지를 분간 못하는 사춘기 아이들이었다. 한 시간 내내 성적 농담을 섞은 헛소리를 하길래 한 시간 내내 웃었다. 그런 말 하면 못 써! 하고 훈계하기엔 나도 망한 인생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일자리가 나를 살렸다. 국어 문법은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오늘 가르칠 것을 오늘 외워서 다 아는 척하며 가르쳤다. 가르치기 위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셨고, 급기야는 책임감에 독서실까지 다녔다. 책상 앞에 앉으니 내가 평생 길러온 습관들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고 책을 읽었다. 나는 망가진 인지능력이 회복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한 달이 좀 안 되었을 때, 국어반이 속해있던 영어학원의 원장님이 나를 불렀다. 목소리가 좋다고, 잘 가르치는 것 같다고. 영어교육과 나왔다던데 영어를 가르쳐 볼 생각은 없냐고. 5년 후에 은퇴를 계획하고 있는데 그때 학원을 물려줄 차기 원장을 물색하고 있었다며, 내게 그 자리를 제안했다.
그것은 분명 동아줄이었다. 나는 그 동아줄을 꽉 잡았다. 내가 쓸모가 있는 사람이라니, 그것 하나면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우울증이 발병해 낙향한 지 4개월, 나는 차기 원장으로 광주의 영어학원에 출근하게 되었다.
[광주 북구 일곡동의 카페 ‘심히 좋았더라’의 커피와 케익. 광주에는 서울만큼 맛있는 카페가 매우 드물기 때문에, 동 3개 당 하나 꼴로 맛있는 카페가 있을 정도이다. 당연히 희귀하기 때문에 비싸다. 누가 광주의 물가가 싸다고 했는가? 음식의 질 대비 가격은 서울이 훨씬 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