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에서야 서울을 포기했다

서울의 팬이 광주로 내려가게 된 계기

by 암사자

그 병은 유독 시작이 언제인 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몇 년 간 그냥 내가 좀 피곤한가 보다, 하며 병을 묵힌다고 한다. 공식적인 진단 기준은 “이런 상태가 2주 이상 지속되었을 것”. 그런데 나는 그 순간 바로 알아차렸고, 무언가가 시작되었다는 직감에 시계를 봤다. 2017년 12월 8일 오후 3시 36분.


심장이 뛰고 발바닥에서 뭔가 간지러운 것이 올라오는 듯했다. 나는 발바닥에서부터 무릎까지 타고 올라오는 스멀스멀한 느낌을 떼어내기 위해 계속 달렸다. 저녁부터는 물을 제외한 어떤 것도 삼킬 수 없었다. 그리고 밤을 꼬박 새워 자살충동을 견뎌야 했다. 12월 7일 밤엔 숙면을 했고 12월 8일 밤에는 죽음의 충동이 덮쳐와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나는 2017년 12월 8일이 금요일이었음을 잊지 못할 것이다. 침대에 눕자마자 알았다. 이건 우울증이다. 나는 꼭 주말을 앞두고 아프더라. 내일 토요일 오전 진료를 받지 못한다면 난 이번 주말 안에 뛰어내릴 게 분명하다. 나는 그 정도 추진력은 있는 사람이다.

인터넷에서 우울증 자가 검사를 찾아 해 보았다. 모든 문항에 다 해당되었다. 나는 원래 365일 중 360일이 행복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그런 내가 오늘 오후 3시 36분부터 갑자기 우울증 환자가 될 수 있지? 온 집중을 다해 내 몸을 침대에 붙인 듯이 누워있었다. 화장실도 뛰어갔다 왔다. 다녀오는 길에 옆길로 새서 뛰어내릴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침 9시가 되자마자 정신과로 뛰어갔다. 차에 뛰어들지 말자! 차에 뛰어들지 말자! 이건 병이다! 뛰어들고 싶은 건 내 진심이 아니라 병의 증상이다! 병원만 보고 뛰었다. 내게 정신과 병원의 간판은 칠흑 같은 밤에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선원의 눈에 보이는 등대 불빛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정신과 의원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한 사람이 진료실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나는 나보다 더 절박했을, 그래서 나보다 더 빠르게 뛰었을 그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여전히 발바닥에서는 스멀스멀함이 올라와 몸서리를 치며 내 차례를 기다렸다. 잠시 후, 20대 초반의 여학생이 눈이 퉁퉁 부어 울면서 진료실에서 나왔다. 나는 그녀가 나와 같은 병을 갖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진료실에 들어갔다. 나는 울지 않았다. 의사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차트에 눈을 고정한 채, 피식피식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우울증 맞으시네요. 이곳 고시촌엔 환자분 같은 사람 많아요.”

“아, 그렇군요. 저 약 먹으면 낫나요?”

“아뇨, 상황이 바뀌어야 낫지 그대로 살면 낫겠습니까? 안 낫습니다.”

“고시 공부를 포기해야 한다는 건가요?”

“그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만, 약 먹는다고 낫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나요? 뭐든 하겠습니다.”

“아니, 안 나을 거라니까요.”



그가 웃길래 나도 웃었다. “만약 그가 no라고 말한다면, 그는 외교관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사람은 의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나도 환자일 수가 없었다. 마음이 탁-하고 닫히며 ‘외교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성적 빼고는 다 외교관스럽게 할 줄 알았다. 아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는 환하게 웃으며 진료실에서 나왔다.

등대의 불빛마저 꺼져버렸다. 발바닥에서는 여전히 스멀스멀한 간지러움이 올라왔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 기분 나쁜 간지러움은 불안 장애의 신체화 증상이었다. 이 스멀스멀함은 자살충동을 동반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곧 “발에서 불안이 올라와.”하며 흐느꼈다. 그 울음소리에 엄마가 문을 열고 들어와 울면서 내게 약을 먹였다. 약을 먹으면 서서히 잦아들었다.


내 안에서는 자꾸 죽음의 욕구가 치고 올라왔으나 그렇다고 해서 해야 할 공부나 일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음식을 전혀 삼킬 수 없었고 눈앞에서 글자가 흩어졌다. 그런데 발바닥에선 불안이 올라와 계속 뛰어야 했다. 점점 남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졌으며 6년 간 살던 동네에서 길을 잃곤 했다. 나는 빠르게 파리해졌다. 그리고 20대 중후반을 모두 바친 꿈을 포기했다. 그 꿈과 내 생명이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마지막 힘을 다 끌어모아 광주로 내려갔다.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내 정식 우울증 검사 점수는 47점이었다. 정상인은 5점 내외이며, 20점 정도면 치료가 반드시 필요한 정도라고 한다. 혼자 있는 순간순간이 위험했다. 나의 머릿속은 자살 사고로 꽉 차있었으나 나는 알았다. 나는 결코 부모님을 두고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중간에 꾸역꾸역 다시 서울로 올라와 직장에 면접을 보고 합격한 적도 있었다. 서울에서 버티기로 결정했었더라도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광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광주에서 훌륭한 정신과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고시촌의 정신과 의사를 만나고 모든 정신과 의사가 훌륭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분을 놓칠 수가 없었다. 2주에 한 번 이 선생님에게 진료를 받으며 우울증 뿐만 아니라 10년간 앓던 불면증까지 고쳤다.

둘째, 열악한 주거환경을 견딜만한 정신 상태가 못 되었다. 서울에서 합격한 직장에 다니게 된다면 아마 마포의 오피스텔촌에서 살게 될 것이었다. 마침 내가 오피스텔을 보러 간 날 미세먼지가 짙어 대기가 황토색이었다. 나는 나 하나로도 버거워서 그 삭막함까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셋째, 부모님의 보살핌이 필요했다. 그 당시의 내 상태는 의지를 끌어모으면 못할 것이 없었으나, 웃고 떠드는 동시에 눈물을 줄줄 흘릴 정도였다. 고장 난 뇌와 버티는 의지의 싸움이 치열했다. 그리고 인지 능력이 저하되어 글을 한 줄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벌어먹고 살 재주라곤 공부밖에 없어서 혼자 생계를 책임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아무 기약도 없이 서울을 떠났다. 서울에 꿈과 사람과 20대를 모두 놓은 채, 부모님 빼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광주로 돌아왔다. 10년 만이었다.



[이것은 광주 수완지구의 유명 솥밥집에서 파는 새우튀김이다. 솥밥은 맛없고 새우튀김은 맛있다. 타르타르소스에 삶은계란을 으깨서 섞은 게 비결이다. 세 개가 나오는데 친구가 두 개 먹으라고 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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