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을 위해 연기했다

첫 직장과 서울 여행

by 암사자


나는 친구들이 “내 남자 친구는 내가 잘 알아. 3년을 사귀었는데.” 류의 말을 할 때가 가장 답답하다. 강동원이 나랑 사귀어준다면 3년이 아니라 5년도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는 여자인 척 살 수 있다. 목적이 있는 연기는 생존 본능과 같은 것이다. 나도 살기 위해 사람들을 속인 적이 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지도 못할 만큼 심각한 우울증 환자였던 나는 1년간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완벽한 선생이었다. 밝고 시원시원하고 포용력 있고 박식한 것으로 빠르게 유명해졌다. 세간에 평가에 나 자신도 놀랐다. 어쩌면 내 천부적 재능은 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당시 나는 매 순간 자살 충동에 시달리고 나 자신을 혐오했으며 지능이 박살 나서 책 한 페이지를 한 시간에 걸쳐 읽었다. 모든 것이 필사적인 노력에 의한 연기였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울며 자다 깨다가, 출근 한 시간 전에 통곡을 하면서 샤워를 했다. 일어서서 씻는 게 너무 힘들어서 몇 번이고 주저앉았다. 어차피 지워질 눈 화장은 하지 않았다.

과수면이 내 증상이었기 때문에 잠을 많이 잤다. 문제는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가 심한 악몽이라는 것이다. 생생하고 잔인한 악몽을 잘 때마다 꿨다. 매 꿈마다 누군가가 죽었다. 그냥 죽는 것도 아니고 으깨지고 찢어져서 죽었다. 죽는 사람이 나 자신일 때도 고통스럽지만 내가 죽이는 사람일 때가 더 끔찍했다. 잠에서 깨고 나서도 손끝에 내가 헤집은 신체의 온기가 남아있는 듯했다. 삶에 대한 정을 떼게 하려고, 미련 없이 가게 하려고 이런 꿈을 꾸게 되나 보다 생각했다.


그때의 출근길은 아직도 생생하다. 집에서 학원까지 8분 여의 거리를 나는 매일 울면서 걸었다. 그 길에 걸린 구름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풍경도 분에 넘쳐 두려웠던 나는 녹음에 울고 단풍에 울었다. 학원에 도착하면 정문에서 눈물을 닦고 화장을 고쳤다. 그리고 문을 열며 누구보다 밝게 외쳤다. “얘들아~”

중학생들이 내가 재밌어서 학원에 다녔다는 사실이 내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가의 증거가 되겠다. 하루에 할 일이라곤 5시부터 9시까지의 수업이 다였다. 그 네 시간을 잘 해내기 위해 나머지 20시간을 처절하게 아파했다. 그로부터 3년 후 내 우울증 사실을 공개하기 전까지, 어떤 학생도 내가 행복한 사람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수고했다.


그러다가 여름휴가를 받아 그 해 여름에 서울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2018년 여름이었다. 꼭 서울이어야 했다. 서울에게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거라고, 나를 잊지 말라고 말을 해야 했다. 여전히 내 친구 홍대가, 서강대교가, 여의도 공원이 잘 있는지 살펴보아야 했다.

서울은 여전했다. 여전히 아름답고 붐비고 비싸고 속도가 빨랐다. 그저 나만 변했다. 나는 원래 서울보다 더 빠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항상 서울에서 여유롭고 즐거웠다. 하지만 병에 걸린 나는 서울이 버거웠다. 내 마음은 아직 서울에 있는데, 언제든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는데, 나는 더 이상 서울에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너무 약했고 보호가 필요했다.

숙소에 돌아와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도착했다는 얘기만 하고 끊으려고 했다.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났다. 좀처럼 다른 사람 앞에서 울지 않는 나의 울먹임에 친구도 놀랐다.


“나 서울에서 사는 10년 간 정말 행복했거든? 그런데 나한테 다신 행복이란 게 없을 것 같아. 여기엔 이제 내 자리가 없고 나는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 나 끝난 것 같아.”


서울 여행은 친구들을 만나러 간 것이었다. 그들에게 나의 반은 곤죽이 되어버린 상태를 가감 없이 공개했다.

- 인지능력이 망가져서 말을 잘 못 알아들어. 이해해줘.

- 광주? 아무것도 없어. 여긴 은퇴해서 여생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곳이야.

- 앞으로? 글쎄. 죽을지 살지도 아직 결정 못 했어.

친구들은 거기서 병 잘 고치고 3년 후쯤 돌아오라고 했다. 3년 후란 그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꽤 먼 미래였다. 나도 3년 후엔 어떻게든 결판이 나 있을 것 같았다. 2년이나 4년이 아니라 굳이 3년이었던 이유는 그저 한국인이 홀수를 좋아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3년 내 회복 내 서울 복귀라는 목표를 제시받은 것 같았다.

3박 4일의 여행을 끝내고 다시 광주 부모님 집의 작은 방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우울증 환자였으나 목표가 있는 환자가 되었다. 다시 서울이 목표 사정권 내로 들어왔다. 서울로 돌아가려면 돈과 경력이 필요했다.

원래는 이 학원에서 일하다 5년 후 원장 자리를 물려받을 계획이었다. 이것은 죽거나 빈곤한 환자로서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것 중 하나로 내 인생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서울 복귀를 목표로 하게 된 이상 모든 계획이 바뀌어야 했다. 약을 꾸준히 먹으며 운동을 시작하고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아닌 목표가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의 변화를 가장 빨리 체감한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나를 진취적인 선생으로 평가하며 자신의 미래를 의논했다. 그러다가 친구를 한 명씩 데려왔다. 학원의 세가 갑자기 불어나기 시작했다. 학원의 흐름이 내게 오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 동림동 카페 마스카프의 카라멜 로투스 크로플이다. 카라멜에 로투스에 크로플까지. 이 크로플을 먹으며 글은 어떻게 써야 좋은 것인가 생각한다. 이 크로플처럼 맛있는 것을 연달아 세 개를 쳐준다면 좋은 글이겠지. 재미와 감동과 통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