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은 정신과에 상담하세요

나 혼자는 가스라이팅인 줄도 몰랐으니

by 암사자


월급을 200만 원만 받아가는 직원 덕에 학원이 유명해지고 학생 수가 늘었다. 그러면 학원의 운영자는 당연히 기뻐했을까?


학원의 원장은 우리 부모님과 동갑이었다. 나는 인생을 포기한 나의 가치를 알아봐 주고 자신이 15년간 키운 학원을 물려주겠다 하신 그분을 내 부모처럼 생각했다. 요리를 하는 날이면 나눠 드렸고 잡일을 도맡아 했으며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도 다 나를 생각해서 이러시는 것이려니 했다.

그러나 학원의 흐름이 내게 오기 시작하면서, 내 학생들이 원장님 반으로 진급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원장 쌤 싫어요. 우리 쌤 반에 계속 있게 해주지 않으면 학원 그만 다닐래요.”


여기에 원장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15년 간 굳건하던 원장의 제국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니가 젊어서 애들이 좋아하나 보다 하셨다. 어느 날은 원장 반에 가느니 관둔다는 애들을 붙잡고 울었다고 한다. 또 어느 날은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학생에게 받은 선물을 자랑했다. 그러던 또 어느 날, 원장이 화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팥떡을 하나 먹이고는 소리를 질렀다. 니가 뒤에서 수 쓰는 것 아니냐고. 애들이 원장반으로 안 가고 싶어 하게 공작하는 것 아니냐고.

정신이 번쩍 들며 모멸감이 들었다. 나는 월급이 작은 건 참아도 내 도덕성을 의심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분께 읍소했다. 숨기는 것 없어요. 원장님께 도움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사과는 없었다. 오히려 그날부터 집요하고 은근한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내가 만든 시험지가 창피하니 폐기하라고 했다. 우울증 걸린 너를, 수면제 때문에 주말 오전 수업을 할 수 없는 너를 누가 써주겠느냐고 했다. 오전에 안 한 수업만큼 저녁 수업을 하는 것은 알고도 애써 잊어버리는 듯했다. 여전히 나는 어른을 거역하는 방법을 몰라 모두 받아들이고 나를 자책했다.


그러다 원장이 계약서를 새로 쓰자고 해서 갔다. 8월부터 월급을 5:5 비율제로 하다가 매년 비율을 조정하기로 했던 기존 계약을 엎고 계속 5:5의 비율을 유지하자고 했다. 이유는 원장 자녀들의 미국 유학비 때문이었다. 나는 그분께 제가 그들의 언니로서 누나로서 함께 유학비를 보태는 마음으로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내가 이렇게 이 분을 부모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 제안이었다. 5년 내에 이 계약을 어기면 위약금 2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것이었다. 5년 간 자신의 자녀들의 유학비를 보태라는 뜻이었다. 나는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다음 주에 사인하겠다고 했다.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투병 생활 중인데, 이 분은 나를 두고 5년간의 이용을 생각하고 있구나. 힘들어서 정신과 의사 선생님께 이 문제를 털어놓았다. 그분의 말씀이 내가 마음을 먹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제가 원래는 의사로서 환자분의 삶에 관여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에요. 이래라저래라 어지간해선 말하지 않는데요. 그분은 나르시시스트이고 지금 환자분께 하는 것이 가스라이팅이에요. 방법은 멀리 도망가는 것 밖에 없어요. 그 직장 그만두고 2주 후에 봅시다.”

내내 순두부 같던 의사 선생님의 단호한 말씀에 놀랐다. 이어 부모님과 은사님들께도 의논을 드렸다. 사회생활 경험이 풍부한 어른들은 원장의 이런 제안에 펄쩍펄쩍 뛰었다. 니가 뭘 모른다 싶으니 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다 하는구나. 당장 관두고 다른 데 취직하거나 니 공부방을 차려라.


하지만 가스라이팅을 벗어나는 것이 쉬운가.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렇게 우유부단하게 굴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첫 번째 이유는 종종 포악해서 그렇지 잘해줄 땐 한없이 잘해주는 원장님을 “배신”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나는 그분이 너무 무서웠다. 퇴사를 말한 뒤 그분이 화내는 것을 들을 생각만 해도 몸을 벌벌 떨었다. 2주 후에도, 또 2주 후에도 학원을 관두지 못한 채 정신과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하루는 환자분 마음대로 하시라며 나를 포기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하루는 나를 붙잡고 나르시시스트 이론 강의를 해 주셨다. 원장은 나르시시스트 사이비교주 스타일이고 나는 사이비에 미쳐 쫓아다니는 신도와 같다고. 사이비 신도의 결말은 파멸이라고. 우울증 때문에 아픈 환자분이 어떻게 사이비교주까지 견뎌요.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의사 선생님의 지속적인 노력에 나는 점차 마음을 굳게 먹었다.

결국 나는 어느 날 밤에 1년 1개월간 내가 원장에게서 받은 것들과 준 것들을 종이에 그리며 계산을 했다. 처음에는 받은 월급도 쓰고 내게 사준 음식들도 썼다. 내게 손을 내밀어준 은혜도, 내게 수업의 자율권을 준 것도 썼다.


하지만 그 몇 가지 이후로 계속 그분이 내게 했던 폭언들만 쓰였다. 폭언의 리스트는 그칠 줄 몰랐다. 너는 안 된다고, 우리 딸은 해도 너는 못 한다고, 니가 나를 일찍 만났으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 거라고. 이런 말들을 용인하는 것은 나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노력한 내 부모에 대한 모욕이라는 결론에 다다라서야 나는 사직서를 쓰기 시작했다.

남녀의 인격은 좋은 때가 아닌 이별 과정에서 드러난다고 했다. 잘해줘 봐야 더 이상 이득 될 것이 없는 관계가 된 후에야 이 사람의 기본 인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퇴사 통보 후 퇴사까지 2주간, 나는 악마를 보았다. 그 2주간은 내게 살아있는 배움터였다. 인간관계를 어떻게 마무리 지으면 안 되는지 생생히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나잇값과 노욕, 예의와 상식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 그분을 떠올린다. 상대에게 무력감을 주려고 소리를 질러봐야 드러나는 건 자기의 바닥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남의 부모가 고개 숙여 인사하면 자기도 고개 숙여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남의 부모가 자신의 위엄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무시를 하기 시작한다는 것도 배웠다.

덕분에 그 2주간 가스라이팅에 의한 죄의식을 씻어내 버릴 수 있었다. 지금은 물론이고 유치원 때도 저보다 예의가 없지는 않았어. 내가 저 사람 밑에 있는 건 말도 안 돼. 나는 우리 집에 공부방을 냈고 6개월이 안 되어 세가 커져 다시 학원을 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원장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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