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선생님과 클럽하우스

귀양 간 외향인의 친구를 향한 고군분투

by 암사자


천부적인 이야기꾼에 의해 쓰인 소설만 읽어도, 사람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온갖 생각을 하게 된다. 하물며 운명에 의해 맞닥뜨린 삶의 새 국면에서야 오죽할까. 나는 와병이 아니었다면 결코 선택하지 않았을 낙향(이라고 쓰고 귀양이라고 읽는다) 생활을 통해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에 가장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학원 사업은 경제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게다가 미성년자 고객은 성인 고객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존재로서 내 일상을 데워주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제야 너는 뭘 해도 될 애였다며, 이제 부족할 게 없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계속 광주에서 함께 살아가자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 매일 밤 피자에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광주에서의 4년을 ‘귀양 생활’이라고 명명했다. 그 이유는 자명했다.


광주에서의 내 삶이 비정상적임을 느낀 것은 첫 학원에 취업한 지 딱 한 달 되던 때였다. 한 달을 보내고 생각을 정리하다가, 나는 이 한 달 동안 부모님과 학원 사람들, 그리고 카페 사장님을 제외하면 어떤 성인과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럴 것이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카페 사장님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곧 호의를 주고받는 관계가 되었으나, 카페의 확장 이전과 함께 그녀도 내 일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로부터 1년 간, 나는 혈연이나 금전으로 엮이지 않은 그 어떤 성인과도 말을 트지 못했다.


친구가 단 한 명도 없는 삶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는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특히 나는 외향적인 성격으로서 사람들 속에서만 에너지를 얻는 성격이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웠다. 이는 곧 내가 1년간 어느 곳에서도 에너지를 얻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학생들은 나에게 따뜻하고 언제나 귀여웠지만 그들과만 함께하는 1년은 내 언어 수준을 퇴화시키고 사고의 폭을 좁혔다. 써야 할 지식의 종류가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하루에 다섯 시간이나 책을 읽었지만, 독서로는 한계가 있었다.


활동반경을 넓혀보려고 시도도 해 보았다. 문제는 내 나이였다. 서울에서 내 나이의 여자들은 많은 수가 아직 싱글로서 사회에서 활발히 움직였다. 그러나 이곳 광역시에서 30대 초중반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나이였다. 내 또래는 새로운 가정 질서에 적응하기 바빠 내가 불러내서 다른 활동을 도모하자고 제안하기가 송구스러웠다. 나는 그때서야 내가 정말 시골에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시골과 서울을 가르는 기준은 영화관이나 백화점이 아닌 성 역할과 나이별 역할에 대한 의식이라는 것도.

전형적인 광주 시민인 옛 중고등학교 친구들은 벌써 애가 둘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라를 구하겠다고 활개를 치고 다니던 나와 이 어린 어머님들은 서로 사랑하고 응원하는 관계였지만 대화가 통하지는 않았다. 남자가 내게 대시를 하면 그 남자는 나보다 10살 어린 대학생이곤 했다. 내 또래 남자들은 직장이 멀쩡하면 아이 아빠가 된 지 오래였다. 나는 모난 돌로서 여기저기 튕겨가며 돌아다녔다.

나는 생존하기 위해 일반화를 거부했다. 나 같은 사람이 이 큰 도시에 없긴 왜 없어. 내가 만난 다른 이방인은 내 학원을 차린 해 겨울 오스트리아-독일 여행을 준비하면서 찾아낸 독일어 선생님이었다. 나보다 두 살이 어린 그녀는 천성이 예술가인 자유 영혼으로, 독일 유학 중 코로나로 광주에 돌아와 나처럼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두 모난 돌은 만나자마자 서로가 동족임을 알아보았다.

우리는 서로를 붙잡고 왜 광주 여자들은 일찍 결혼해버리는가, 왜 일찍 결혼해서 나랑 안 놀아주는가에 대해 성토했다. 둘이 맛집을 찾아다니고 술을 마시며 독일과 서울과 젊음과 꿈과 시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 독일어는 형편없었다. 일전에 한국어나 영어, 프랑스에서 보지 못한 괴팍한 관사를 배우는 단계에서 그 언어에 정이 떨어져 버린 탓이었다.


그러나 나는 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흔히 처음부터 배우는 “얼마예요?”, “비싸요.”, “화장실이 어디예요?” 류의 정보성 문장은 영어로 충분하다. 진짜 원어로 배워가야 하는 문장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오스트리아에 오기 위해 3개월 동안 독일어를 배웠어요. 그런데 잘 못해요. 나는 실패한 학생이에요.”

이 한마디면 그 나라 국민들이 내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살살 녹는다. 가장 정 많고 사람을 긍휼 하게 볼 줄 아는 세대는 40대 여성인데, 그들은 불쌍한 “실패한 학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결국 그 문장으로 그 해 겨울, 오스트리아 아주머니들을 녹여 평온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 문장만 남은 독일어 수업이었지만 나는 내 독일어 선생님, 박소영을 얻었다.

친구를 사귀려는 노력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개팅 어플 ‘틴더’에 가입하여 피 같은 돈 11만 원을 쏟아부었지만, 남자들이 다들 옷을 안 입고 있어서 곧 포기했다. 여자들에도 말을 걸어보았지만, 그들은 나를 다단계로 끌어들이는 사람이 아닐까 경계하며 거절했다. 소개팅 어플의 세계는 내가 찾던 진실된 사교의 세계가 아니었다.


내가 친구를 사귀기에 성공한 곳은 “클럽하우스”였다. 말로 하는 sns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하루에 15시간씩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곧 나의 친구들을 모아 “사자 우리”라는 클럽을 만들고 1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서울과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는 30~34세의 사람들이고, 내가 목말라하던 넓고 빠른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서울로 올라가게 되는 날” 같은 건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칼을 뽑아 들어야 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던 어느 날, 나는 학원을 팔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다음 날 학원을 부동산에 내놓았다.


나는 결국 사람에 의해 원동력을 얻어 서울로 간다. 주위 어른들은 내가 모든 걸 내려놓고 맨주먹으로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의 사람에 대한 열망은 지난 4년간 꺼진 적이 없다. 그건 나만 안다. 젊은 사람들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 불 속으로 나도 뛰어들리라. 아직 내 안의 불꽃이 사그라들지 않아서 이 평온한 시골에서 더는 누워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먹고 싶은 음식을 징그러울 정도로 먹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위 사진은 감자튀김 4개로 10,000원 어치이다. 감자튀김은 내 접시 위에서 자가 증식을 하여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았다. 결국 상당량을 버리고 나서야 나는 감자튀김에 대한 갈망을 떨쳐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