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사자 어린이의 장래희망 중 유의미했던 것은 딱 두 가지이다. 유치원 때의 꿈인 경찰과 초등학교 6학년 때의 꿈인 드라마 작가가 그것이다. 이 두 가지만이 내가 진짜 원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꿈은 부끄러움과 함께 바스러졌다.
경찰의 꿈은 다른 유치원 친구들의 꿈인 “간호사”에 밀려 한 번도 발표되지 못했다. 여자아이의 꿈 치고 너무 “남성적인” 꿈이었기 때문에 간호사가 뭔지만 겨우 아는 주제에 간호사를 꿈꾸는 척했다. 나는 그 기억만으로도 1993년도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경찰이 꿈이라고 말하면 주변 아이들이 “히이이익”거리며 힐끔거리는 시대라니.
드라마 작가의 꿈은 더 쉽게 사라졌다. 그 꿈은 한 학생을 지루한 입시공부에 전념하게 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에 의해 폐기되었다. 중학생이 되자 그 꿈은 아이돌이 되거나 화가가 되겠다는 꿈처럼 어린이의 순진한 꿈으로 치부되었다. 부모님으로부터 교사를 목표로 할 것을 주입받았는데,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학교를 다니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작가가 되어 세계를 새로 만들어내고 싶었다. 세상에 이야기보다 재미있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하루 종일 노트에 등장인물의 이름을 짓고 대사를 만들어 따라 했다. 나는 지금도 연기를 꽤 잘하는데 이는 나의 셀프 조기교육 덕분이다. 나는 범인을 잡거나 왕비를 폐비시키거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것은 싫었다. 픽션이 논픽션이 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인물의 이름을 빼곡히 지어 놓은 노트를 가지고 있었다.
기억나는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김유수이다. 11살쯤이었던 것 같은데, 피부가 하얗고 뻗친 머리를 가진 김유수는 정의로운 성정을 가진 초등학생이었다. 그는 내가 심심할 때마다 흔한 이름을 가진 나쁜 친구에게 옳은 말을 하고 사라졌다. 어떤 날은 그 전날에 본 드라마의 대사를 각색한 것을 김유수가 울먹이며 말하기도 하였다.
모두가 이렇게 인물을 만들고 이야기를 쓰는 줄 알았다. 나는 집에 가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꽤 커서야 알고 깜짝 놀랐다. 드라마 대본을 써서 반 친구들에게 연기하도록 시키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방학 숙제로 100장짜리 세종대왕의 일기를 제출했다. 물론 내가 세종대왕으로서 쓴 일기였다.
할 말이 너무 많았다. 나는 너무 쉽게 슬퍼졌으며 그 감정을 변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학교 때부터는 팬픽을 썼다. 학생 작가 암사자의 고난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팬픽은 모두가 썼다. 학교 백일장은 나 같은 지루한 모범생만 참가해서 수상하기가 쉬웠지만 팬픽은 전국의 H.O.T. 팬들에게 열려 있었다. 나는 금방 내가 팬픽 작가로서 인기가 전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노트에 써서 강제로 같은 학교 H.O.T. 팬에게 돌리면 착한 언니들이 고맙게도 재미있다고 거짓말을 해 주었다.
교복을 입는 기간 내내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 레이더에는 좋은 음악이나 예쁜 학용품이 걸려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림도 못 그리고 시시한 노래를 듣는 재미없는 범생이였다. 학용품 하나를 골라도 감성이 있는 친구들은 달랐다. 안 그래도 타고나지 못한 예술적 감수성은 입시에 필수적이지 않았다. 나는 겨우겨우 논설문 대회에서나 상을 받아 생활 기록부에 남기는 학생이 되었다.
나중에서야 깨닫게 된 것이지만 몰취향은 전형적인 시골의 서민 가정의 장녀에게 적합한 것이었다. 나에게 쓸모없지만 아름다운 것을 사랑할 기회가 주어졌었던가? 사람들은 호불호가 강하지 않은 나를 무던하다고 칭찬했다. 까다로움도 사치임을, 그 사치는 부모를 힘들게 할 것임을 나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시간과 돈을 쓰면 성적으로 산출되어야 했다. 나의 부모도 그 시대의 부모들이 다 그랬듯 본인들은 덜 먹고 덜 입으며 자식들에게 자원을 몰아주었다. 그러나 62년생들이 가치 있다 평가하는 모든 것은 새마을 운동의 정신과 궤를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 사회 전반에서 터져 나오기 전에 나의 학창 시절이 끝났다.
15년이 지났다. 부끄러움으로부터 회피하는 방법은 다양해서 15년이나 이리저리 도망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전염병이 심하니 돌아다니지 마시오. 우리 모두는 그 옛날 집에서 꼼지락거리며 놀던 초등학생으로 돌아갔다.
어릴 때 게임을 하던 친구는 컴퓨터를 업그레이드하고, 어릴 때 엄마를 잘 돕던 친구는 인테리어를 하고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림을 제일 잘 그리던 우리 반 친구 연화는 모르긴 몰라도 그림을 그렸겠지. 연화가 갑자기 수학책을 사서 미적분을 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글을 쓰던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마치 운명처럼,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이.
사장이 되고 외출 자제 권고를 받자 시간이 너무 남았다. 자다자다 체력이 넘치고 할 일은 없어서 화가 났다. 내가 하루에 4시간밖에 쓸모가 없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은 임용 시험공부를 하겠다고 책을 샀고, 또 어느 날은 심리상담사가 되겠다고 책을 샀다. 캐나다에 사는 친구 TK가 이유를 물어서 대답했다.
“심리상담사가 돼서 일을 한 다음 결국엔 작가가 되고 싶어.”
그러자 똑똑한 친구는 현답을 내주었다.
“원하는 게 있는데 돌아갈 필요가 뭐가 있어? 그냥 바로 작가가 되면 안 돼?”
하루에 20시간이나 놀면서 일기를 쓰는 주제에 이 생각을 한 번도 못 했다니! 나는 충격을 받아 잠을 자기 시작했다. (우울증의 후유증으로, 나는 충격을 받으면 과수면 증상이 도진다.) 이틀을 꼬박 잔 후에 출사표를 던졌다.
“훌륭한 사람이 되면 작가가 되려고 했는데 언제 훌륭해질지 알 수가 없어서 우선 작가가 된 후 훌륭해지려고 합니다.”
나의 부족한 감성과 편의주의적 손익 계산, 상상력 부족은 여전히 내 단점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나는 괜찮은 작가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고 해서 써 보지도 않고 접고 싶지는 않았다.
세상이 원하는 작가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믿고 싶다.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취향이 세상에 있다는 말이 나에게 용기를 준다. 누군가는 내 글을 좋아하겠지. 이 글도 누군가 읽어 주겠지.
그리고 언젠간 김유수도 완성되어 누군가에게서 사랑을 받을 것이다. 김유수가 영감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한다면, 그때가 내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일 것이다. 나는 내 꿈을 이루는 것을 너무 먼 훗날의 일로 미루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