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간의 광주 유배가 내게 남긴 것 - 1
꽃이 지고 나서야 그것이 봄이었음을 안다고 하던가. 손안에 있을 땐 소중함을 모르다가 멀어지고 나서야 재정립되는 관계도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엄마와 딸의 관계라든가.
나와 엄마는 “용호상박”이라는 단어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용호상박이란, 용띠인 나와 호랑이인 엄마는 함께 어울려 살 수 없다는 뜻이다. 내 20대 때 성장의 8할은 엄마에 대한 원망, 엄마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한 연구에서 비롯한 것이다. 나 빼고 모두가 사랑하는 우리 엄마와 엄마 빼고 모두와 잘 지내는 나. 서로를 이해하기엔 각자 평판이 너무 좋았다.
엄마는 분명 내 자랑이었다. 내가 엄마의 딸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내 잠재력을 높게 샀다. 그러나 그런 엄마와 살던 10대 때가 내 인생의 암흑기였다. 나는 10대로 돌아가느니 10살 더 늙어버리는 길을 택할 것이다. 서울로 대학을 가 엄마와 따로 살게 되면서 나는 행복해졌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엄마와 나의 사랑에 대한 정의가 달랐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자식 사랑이란 자식을 위해 밥 하고 청소하고 빨래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에게 엄마가 말하는 사랑은 다른 사람이나 기계에 맡길 수 있는 잡무일 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가사 노동만으로 자식에 대한 사랑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위로도 격려도 칭찬도 거의 받아보지 못하며 자랐는데, 청소 열심히 했으니 나를 충분히 사랑했다고?
게다가 자신의 학벌과 지성에 자부심이 있던 엄마는 배움이 덜한 사람들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6년간 극성 학부모로서 나를 달달 볶았다. 엄마는 똑똑하고 무뚝뚝한 사람, 즉 이성이 발달하고 감성을 내다 버린 사람의 전형이었다. 엄마는 전형적인 “아줌마”와는 약간 다르던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
그런데 나는 학식이 부족한 친구 어머니들이 자식에게 하는 애정의 행동을 볼 때마다, tv에서 시장에서 생선 팔고 남의 집 도우미로 일하는 엄마 캐릭터가 자기 자식 역성드는 장면을 볼 때마다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울었다. 나에게 우리 엄마는 배우다 만 인간의 전형이었다. 똑똑하다한들 엄마가 의사 같은 고수입 직업을 가져 내 입에 은수저를 물려준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저럴 거면 아예 배우질 말지. 당신의 어설픈 지성이 나에게서 “엄마”를 빼앗아갔다며 원망했다.
서울에서 사는 10년 간, 한 달에 두 번 정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엄마에 대한 분노에 힘들어했다. 길을 걷다 울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울고 밥을 먹다 울었다. 그리고 엄마를 타산지석 삼아 내 인생의 방향을 설정해 나갔다. 절대 어설프게 배우지 말 것. 배웠으면 반드시 부유해져서 부를 주변 사람들과 나눌 것. 그렇지 못할 거면 완전히 겸손하게 살 것.
나는 우울증이 아니었으면 낙향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엄마와의 관계를 영영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울증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내가 엄마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이 비참했다. 내가 옳고 당신이 틀리다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내가 당신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내가 광주 부모 품으로 돌아온 것은 기나긴 엄마와의 싸움에서 참패했다는 방증이었다.
그런데 나의 병에 엄마가 바뀌었다. 엄마가 나를 위해 울었다. 이제 그만 살고 싶다는 나의 말에, 엄마는 드디어 드라마 속 모성애에 가득한 엄마처럼 울었다. 왜 그래, 혜우야. 그냥 엄마 딸 계속 하자. 엄마의 절규에, 어린 날의 나는 위로받았다. 우리 엄마도 나를 사랑하는구나. 내가 죽으면 엄마의 삶도 끝이구나. 나도 그런 엄마를 가졌구나.
물론 대단히 헌신적으로 나를 보살피거나 내 성에 찰 만큼 사랑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서른이 되어서야 내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처음 실감했다. 그리고 내가 바란 건 오직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똑똑한 척은 다 하면서 내게 은수저는 못 물려줘서 못 마땅했던 것이 아니라, 나를 “엄마답게” 사랑해주지 않아서 내가 슬프고 외로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발병 초기 3개월 간 엄마와 함께 살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곧 학원 근처로 자취방을 얻어 나갔다. 그 후로도 4년 간, 종종 울며불며 싸웠다. 엄마의 냉정함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다. 저런 엄마는 없는 게 낫다 싶어 인연을 끊었다 화해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의 관계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우상향 해갔다.
결국 서울로의 복귀를 계획하면서, 다시는 엄마와 함께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서울행을 망설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전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긴 서른에 광주 낙향보다 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또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이후 4년 간 있었던 일은 모두 기적이었다. 내가 엄마의 사랑을 믿으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 가장 큰 기적이라 생각한다.
이제 노년에 접어드는 엄마를 보며 나도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훌륭한 딸로 크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어릴 땐 내가 내 엄마 하나 정도는 내가 가볍게 호강시킬 줄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나 하나도 주체 못 하는 야무지지 못한 35세라는 것이, 그것을 엄마도 알기에 내게 기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미안하다.
내가 나의 부족함에 미안해할 때마다 엄마는 “아이는 세 살 때까지 평생 할 효도를 다한다더라.”하며 그때 내게 효도를 다 받았다고 말한다. 내가 엄마에게 소리 지르고 저주하며 바랐던 것은 사랑인데, 엄마가 내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아무것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먹먹해진다. 죽지 말고 오래오래 엄마 딸 하는 것. 정말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면 나는 어쩌지.